
김은혜 경희대학교 산단 연구원
(전 강동경희대한방병원 임상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경희대 산단 연구원의 글을 소개한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주치의를 몇 개월만 해봐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을 마주할 수 있다. 몇 십 년 동안 환자의 간병을 자처하면서도 군말 한 마디 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보호자도 있고, 아들딸 얼굴 한 번 보고 떠나겠다고 문자 그대로 온 영혼을 끌어서 눈 한번 마주치고는 떠나는 환자도 있다.
비단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깊이 연결된 주위의 누구나 아주 긴 이별을 앞둔 때에는 기대도 못 했던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애틋한 광경을 몇 번 보다 보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주는 위로의 위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공동체가 거동도 힘든 이들 앞에서 와해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일 때면(주로 이런 경우는 경제적 문제로 인한 분란이 대부분이다) 환자들은 한없이 초라한 표정을 짓곤 했다.
감동이 오갈 때보다 고성이 오가는 현장에서 오히려 환자들의 초연한 얼굴이 더 눈에 잘 들어왔었다. 때때로는 보호자들의 입장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줄 수 있는 두려움 또한 몸서리치게 만들 때가 종종 있었다. ‘있을 때 잘하자’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이것 또한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나중에 후회할 일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치관이 각자의 마음속에 세워지기를 바라며 한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헐, 오빠! 배에 물차면 3개월이래!”
컴퓨터로 병원 전자 차트를 열자 지난밤 동안 쌓인 간호 기록이 쭉 떴다. 그중 하나에 강조 표시가 된 알림이 있었다. ★ OOO 환자 보호자 분들 오후에 면담하러 오신대요.
며칠 전 혼자 병원을 찾아와 “쉬기만 하다 갈렵니다”라고 말하고 1인실로 들어간 말기 대장암 환자의 알림이었다. 일상복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환자복으로 갈아입자 불룩 솟아오른 배가 확연히 보였던 환자였다. 그 배 안에는 복수가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말기 암이더라도 그 정도 양의 복수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모른 척 환자에게 다가가 치료 얘기를 꺼냈더니 바로 단호한 거절의 말이 돌아왔었다.
“치료는 괜찮습니다. 그냥 편하게 쉴 수만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그날 이후로 관리 차원의 치료만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전달된 보호자들의 면담 요청이었다.
보호자 분‘들’이라기에 두세 명 정도 올 거라 예상했는데 6명의 어른과 1명의 남자아이까지 찾아와 병원이 북적였다.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를 살짝 들어보니 6명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들이었고, 아이는 그중 한 쌍의 아들인 듯했다.
면담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예상보다 많은 보호자가 스테이션을 꽉 채우고 있어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아이는 그 안에서 자꾸 뛰어다녔고 아이를 말리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까지 더해져서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환자의 경과가 전형적인 말기 대장암의 예후를 따라가고 있는 상황이라 설명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의무기록지에 적혀 있는 치료 이력을 말하고 가장 최근에 다른 병원에서 찍어온 CT 영상과 우리 병원에서 시행한 검사 결과를 보여주며 면담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암 치료를 받으신 지가 1년 넘으신 것치고는 결과가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배 둘레가 100cm가 넘을 정도로 복수가 차 있는 게 좀 걱정이 됩니다. 환자분은 추가적인 치료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일반적으로 말기 암 환자분에게 복수가 차는 게 보이기 시작하면 평균적인 여명을 3개월 정도로 설명 드리고 있어서…….”
“헐, 오빠! 배에 물차면 3개월이래!” 설명을 뚝 끊으며 외치는 소리였다. 이어서 그들만의 대화가 오갔다. “아버지 언제부터 배부르기 시작했는지 본 사람 있냐?” 기록에 따르면 약 두 달 전부터였다. “아무도 모르지! 노친네가 맨날 혼자서만 다녔잖아. 꽁꽁 숨기는 버릇은 옛날부터 여전해.”

“왜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세요”
면담을 중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법적 보호자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는 나로서는 이론적으로 한 달가량 여명이 남았다는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들은 보호자들은 갑자기 “네, 네”라고 말하며 면담을 성급히 종료시키더니 시간에 쫓기듯 짐을 부랴부랴 챙겨서 환자의 병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후부터는 병실 밖까지 들리도록 크게 이야기하기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가족 간의 대화이다.
“아버지! 한 달 남으셨대요!” “그래서?” “이제 좀 숨기고 있던 거 다 꺼내놓으세요! 자식이 뭘 그렇게 뺏아 간다고 암인 것도 숨기셨어요?” “이제 알았으니 숨긴 거 없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잖……! 하…….” “에이, 장인어른~ 무슨 말인지 아실 분이 왜 그러세요.”
“형부는 뭘 아신다고 나서세요? 아빠! 옛날에 우리한테 주기로 약속했었잖아~” “맞아요, 아버님. 그때 이야기 다 하셔놓고 왜 이제와서 모르는 척이세요.” “그쪽은 순서가 안 맞지~ 아버지! 그거 저한테 주실 거죠? 하나뿐인 손주도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와있어요.”
이후의 내용은 생략한다.
“응, 어쩔 수 없지”
우리 병원의 1인실 비용은 하루에 40만 원 정도 된다. 유일하게 보험이 안 되는 병실이라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환자는 그 1인실에서 딱 40일을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병실료만 1600만 원이 나왔을 것이다.
임종이 다가오면 보호자가 마지막을 지킬 수 있도록 연락을 한다. 돌아가시기 전날, 보호자에게 전화를 하려 번호를 조회했더니 서로 다른 번호 4개가 등록되어 있었다. 어떤 번호가 주 보호자의 것인지 몰라 4명 모두에게 전화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담 때 봤던 얼굴들이 모였다. 내가 아는 바로는 다들 면담 때 만난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모인 거였다. 그간 보호자들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지난번처럼 큰소리로 대화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온 보호자들이 병동을 벗어나면서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는 더 이상의 관심을 그들에게 쏟고 싶지 않았다.
“장례비 처리는 n분의 1 하는 거지?” “응, 어쩔 수 없지.” “하, 그러게 왜 그 큰돈을 연고도 없는 학교에 다 줘가지고…… 노친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