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에서 말하길,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애닯도다 부모님이시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셨도다. 그 깊은 은혜 갚고자 하나 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詩曰, 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鞠勞 欲報深恩 昊天罔極)’
-명심보감 효행편 (明心寶鑑 孝行篇).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질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신다’는 시경(詩經)의 가르침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낳는다’와 ‘기른다’라는 두 가지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의 ‘본성(또는 성격)’에 대한 물음으로 질문을 좁혀보면 대답은 그리 간단치가 않은 것 같다. 과거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에서는 무엇이 본성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고, 본성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주장과 본성은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주장이 현재까지도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는 주장은 논쟁 초기에 주도권을 차지했지만, 나치 독일의 ‘우생학’과 ‘인종우월주의’에 학문적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사실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가져온 충격으로 인해, 유전결정론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환경, 교육, 문화의 힘으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함양할 수 있다는 환경결정론자가 논쟁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환경결정론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도덕적 인간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공산주의의 몰락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전결정론’은 다시금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를 필두로, 진화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극단적인 논쟁을 상호 공존의 구도로 바꾸려는 노력 또한 있어 왔다. 최근 매트 리들리(Matt Ridley)의 책이 ‘본성과 양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핵심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한 근거 제시에 있다. 저자는 유전자가 그 자체로서 발현되지 않고, 환경의 자극에 의해 발현의 방식이 조절되고 있다며, ‘양육을 통한 본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과연 유전결정론이 맞을까? 환경결정론이 맞을까? 아니면 둘 다 맞을까? 이러한 논쟁은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하여도 모두 소모적인 논쟁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들 논의의 출발점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드린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la)의 ‘제2의 자아’에 대한 개념은 이들 논쟁에 꼭 포함되어야할 핵심개념이다. 적어도 한의사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제2의 자아가 면역계를 통해 발현되고 있다는 바렐라의 지적은 4체액설에 근거해 인간의 기질을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로 분류한 고대 서양의학의 전통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에 감정과 정신작용을 배속시킨 한의학의 전통과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체액을 본성 결정의 한 요소로 파악해보려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본성과 양육의 논쟁에서 승리하는 방법, 그것은 ‘나’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일 것이다.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식은 사상누각과 같다는 스승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