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속초2.9℃
  • 흐림0.2℃
  • 흐림철원-0.6℃
  • 구름조금동두천-1.2℃
  • 맑음파주-3.3℃
  • 흐림대관령-0.5℃
  • 흐림춘천0.7℃
  • 맑음백령도2.7℃
  • 구름많음북강릉5.6℃
  • 흐림강릉6.6℃
  • 흐림동해7.0℃
  • 맑음서울0.7℃
  • 맑음인천0.0℃
  • 구름많음원주0.8℃
  • 비울릉도7.2℃
  • 맑음수원0.6℃
  • 흐림영월2.6℃
  • 흐림충주0.2℃
  • 맑음서산-1.2℃
  • 흐림울진7.3℃
  • 흐림청주2.7℃
  • 흐림대전0.9℃
  • 흐림추풍령1.1℃
  • 흐림안동2.1℃
  • 흐림상주1.7℃
  • 흐림포항7.7℃
  • 흐림군산2.0℃
  • 흐림대구5.4℃
  • 흐림전주2.2℃
  • 흐림울산6.8℃
  • 흐림창원7.1℃
  • 흐림광주3.2℃
  • 박무부산7.9℃
  • 흐림통영7.9℃
  • 흐림목포5.2℃
  • 흐림여수6.0℃
  • 흐림흑산도6.1℃
  • 흐림완도4.5℃
  • 흐림고창2.9℃
  • 흐림순천2.7℃
  • 구름조금홍성(예)0.1℃
  • 흐림0.7℃
  • 흐림제주8.1℃
  • 흐림고산8.4℃
  • 흐림성산7.4℃
  • 흐림서귀포12.5℃
  • 흐림진주6.3℃
  • 맑음강화-0.3℃
  • 맑음양평-0.2℃
  • 구름조금이천-0.5℃
  • 흐림인제-0.1℃
  • 흐림홍천0.4℃
  • 흐림태백1.5℃
  • 흐림정선군2.6℃
  • 흐림제천1.3℃
  • 흐림보은0.1℃
  • 구름많음천안1.4℃
  • 구름조금보령0.3℃
  • 흐림부여0.9℃
  • 흐림금산0.8℃
  • 흐림1.2℃
  • 흐림부안3.3℃
  • 흐림임실2.2℃
  • 흐림정읍2.5℃
  • 흐림남원2.6℃
  • 흐림장수0.5℃
  • 흐림고창군3.0℃
  • 흐림영광군3.5℃
  • 흐림김해시6.4℃
  • 흐림순창군2.0℃
  • 흐림북창원7.0℃
  • 흐림양산시8.8℃
  • 흐림보성군5.0℃
  • 흐림강진군4.3℃
  • 흐림장흥4.0℃
  • 흐림해남4.5℃
  • 흐림고흥4.3℃
  • 흐림의령군4.8℃
  • 흐림함양군3.1℃
  • 흐림광양시5.4℃
  • 구름많음진도군5.5℃
  • 흐림봉화2.0℃
  • 흐림영주1.5℃
  • 흐림문경2.1℃
  • 흐림청송군3.8℃
  • 흐림영덕6.6℃
  • 흐림의성3.7℃
  • 흐림구미3.0℃
  • 흐림영천4.7℃
  • 흐림경주시6.3℃
  • 흐림거창2.5℃
  • 흐림합천4.6℃
  • 흐림밀양7.3℃
  • 흐림산청4.4℃
  • 흐림거제7.7℃
  • 흐림남해7.7℃
  • 흐림8.1℃
기상청 제공

2025년 12월 24일 (수)

[儒醫列傳 80]조선 역사 속 비운의 儒醫

[儒醫列傳 80]조선 역사 속 비운의 儒醫

B0112007101946225-1.jpg

康命吉은 조선 문화의 황금기인 영조와 정조년간에 御醫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의술로 당대 최고의 의사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영조 44년인 1768년에 의과고시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온 후에 정조대까지 의술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1794년에는 首醫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종1품인 崇祿大夫까지 오르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와 같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데에는 그의 깊은 학식과 인격을 정조가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康命吉은 1799년 왕명에 따라 ‘濟衆新編’이라는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東醫寶鑑’의 단점을 극복하고 활용도가 높은 의서를 만들고자 하는 정조대왕의 의지의 반영으로서 康命吉은 이를 잘 수행해냈다. 일명 “芟繁補漏” 즉 “번잡한 것을 베어내고 빠진 것을 보충한다”는 이 책의 편집방침은 이러한 목표에서 설정된 것이었다. 지창영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芟繁’에 대해서는 경락학적인 부분, 질병서술의 부분, 진단의 부분, 질병의 분류, 유사한 증상, 병리기전에 대한 부분, 운기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이루어졌고, ‘補漏’에 대해서는 ‘東醫寶鑑’의 내용에 대한 補漏, ‘東醫寶鑑’에서 잘못 인용하고 있는 문장을 바로 잡음, 약물의 가감, 外症·自覺症狀·時間에 따른 疾病의 間甚, 常病中에 ‘東醫寶鑑’에서 빠진 부분 등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새로운 醫論을 新增하였고, 老人處方과 藥性歌를 첨부하고 있다.



이렇듯 한의학사에 남는 명저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으로 정조의 죽음 이후에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말았다. 순조가 즉위한 후에 정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덮어쓰고 죽게 된 것이다. 정조와 친하게 지냈던 이력을 볼 때, 이것은 반대파의 숙청이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