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중세사회가 이윤과 이자의 획득을 죄라고 규정한 이상, 그곳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선 재화 획득에 대한 정당성 부여가 선행되어야 한다.
서구사회에서 이윤의 추구에 정당성을 부여한 사람은 종교개혁가 칼뱅(Jean Calvin)이었다. 당시 성직 이외의 직업을 모두 천시하던 상황에서, 칼뱅은 모든 직업은 신에게서 부여받은 사명이며, 노동은 신성하다고 하였고, 정당한 재화의 획득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자, ‘선(善)’한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러한 종교적 토대가 있었기에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베버가 말한 ‘종교적 토대’란 칼뱅에 의해 해방된 이윤 추구의 행위가, 금욕주의라는 종교적 안전장치 내에서 작동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어떠한가.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 일본, 경제동물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단시간 내에 많은 자본을 축적한 일본에도 칼뱅과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책에는, 일본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정신을 심어준 사람으로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과 그의 스승 스즈키 쇼산(鈴木正三)을 들고 있다. 이시다 바이간은 유교의 덕목인 ‘의(義)’를 통해, 오사카 상인들을 비롯한 일본의 상인들에게 자본주의를 싹 틔울, 상인 정신과 윤리를 가르쳤다. 그 내용은 칼뱅주의(Calvinism)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 그 자체를 중시하고 어떤 직업이건 귀하게 여겼으며, 항상 소비자를 위하는 정직한 이윤의 추구는 ‘선(善)’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은 근면, 성실, 정직, 근검절약 등의 덕목들 위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의 사상이 칼뱅주의와 다른 점은 오직, 기독교의 ‘신(神)’을 상정하지 않은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두 사상가의 가르침은 서로 비슷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서구나 일본처럼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를 쌓지는 못한 것 같다. 우리가 부러운 마음으로 전해들을 수밖에 없는 서구 자본가들의 기부문화는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이 그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과정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자본의 역사에 새겨져있는 ‘돈 버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그들이 사회 공헌에 대한 의무를 저버릴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돈 버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돈 쓰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다르지 않을 터, 자본주의 정신의 또 다른 바탕인 근검절약의 정신도 결국은 같은 뿌리일 것이다.
이처럼 근검절약, 근면, 성실, 정직 등의 덕목들과, 돈 버는 일이 ‘죄(罪)’였던 시대의 기억들은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기의 덕목들은 이미 나에게서 멀어졌고,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죄스러운 돈’에 대한 기억 또한 한국의 자본가들에게는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생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형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돈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내가 벌고 있는 이 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적어도 돈에 휘둘리는 삶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큰 집, 비싼 옷, 산해진미에 대한 욕망과, 내 가족, 내 자식에 대한 욕심으로, 어떻게든 좀 더 많은 돈을 벌어야하는 지금, 돈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모여 한국형 자본주의 정신을 잉태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그 탄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길 기대해본다. 과거, 가난한 노래의 씨를 광야(曠野)에 뿌렸던 시인의 마음처럼, 그렇게 한국형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을 기다려보고 싶다. 물론 그때까지 나의 괴로운 고민은 계속 될 것이다. ‘내가 벌고 있는 이 돈이 정말 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