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학 부산대학교한의학전문대학원 침구의학과 겸임교수
멀티오믹스와 한의학
한의학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 중 하나는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다’라는 주장입니다. 가끔 동료 한의사들조차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놀라곤 합니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입니다. 즉, 어떤 분야든 증거, 검증 가능성, 그리고 재현성이 확보되면 과학의 범주에 속합니다. 최근 한의학 연구는 이러한 과학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복합적인(Complex) 치료법이라는 점에서, 기존 연구방법론을 적용해 증거와 재현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최근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멀티오믹스(Multi-omics)는 최근 과학 기술 발전을 대표하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멀티오믹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멀티오믹스는 현대 의료가 환자 맞춤 치료를 넘어 정밀의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술입니다. 다양한 생물학적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여 질병의 발생과 진행, 그리고 치료 반응을 예측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멀티오믹스 기술이 한의학과 융합된다면, 기존 한의학의 강점에 과학적 근거를 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멀티오믹스란 무엇인가?
멀티오믹스는 유전체(Genomics), 단백질체(Proteomics), 대사체(Metabolomics) 등 생물학적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물학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신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를 하나의 퍼즐로 보고, 이를 맞춰가며 질병의 원인을 찾고 치료 방안을 제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이처 연구 사례: 반하사심탕과 설태의 관계
최근 네이처(Nature)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멀티오믹스를 활용하여 반하사심탕이 설태(혀의 태)에서 미생물 군집과 대사체 변화를 어떻게 유도하는지를 밝혀냈습니다. 이 연구는 반하사심탕이 만성 미란성 위염 환자의 황색 설태(Yellow Tongue Coating, YTC)에 나타나는 미생물 군집과의 상관관계를 분자 수준에서 입증한 사례입니다. 연구 결과, 황색 설태를 가진 환자의 설태에서 Bacillus 속 세균이 유의미하게 관찰되었으나, 반하사심탕 치료 이후 이 세균이 감소하거나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특정 한약의 작용 기전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한의학의 과학적 기반을 강화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멀티오믹스와 한의학의 융합 가능성
한의학은 수천 년간 축적된 전통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환자의 전인적 상태를 진단하고 치료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통적 접근법의 모호성은 한의학의 국제적 확장에 도전 과제로 작용해 왔습니다. 멀티오믹스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한의학의 전인적 접근법과 과학적 분석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멀티오믹스를 활용하면, 환자의 유전체, 단백질체, 대사체 데이터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개인의 체질과 상태를 평가하고, 이를 통해 맞춤형 한약 처방이나 침구 치료를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질병의 발생 기전과 관련된 유전적 소인을 가진 환자들에게 멀티오믹스 기반의 한약 조합을 제공하거나, 침 치료가 신경계와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자 수준에서 분석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의학의 전통적 지혜를 현대 과학의 언어로 해석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멀티오믹스와 한의학의 융합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이 분야는 한의학이 현대 의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한의사들이 멀티오믹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확장해 나간다면, 학문적 우수성과 과학적 근거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학제 간 소통을 강화하여 한의학이 국제적 의료 환경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