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한의사협회 정준희 약무이사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들, 한의진료에 무한 신뢰
선수들의 강한 요구로 팀닥터에 한의사 합류
장애인주치의제, 최우선 보완할 점은 ‘한의사 참여’
자카르타를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지만, 그 덥고 습한 날씨는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한낮 기온이 평균 35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서 아침에 만든 도시락이 점심시간까지 신선하게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는 여러 선수들과 대회관계자들을 장염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런 힘든 상황(날씨뿐만이 아니다. 시설문제, 교통문제 등 전반적인 상황이 열악했다)에서도 선수들은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연일 구슬땀을 흘렸다.
본래 ‘장애’라는 큰 산을 넘어 국가대표 자리까지 오른 선수들이 아니던가. 오늘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고 경기 후에는 내일 더 나은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하고자 진료실을 찾는 선수들의 열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 자신이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진료실을 찾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근육과 관절 문제를 호소했다.
아무래도 신체장애를 갖고 있다보니 일정 부위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선수들이 근육, 인대손상을 갖고 있던 터에 이번 대회를 앞두고 집중적인 훈련을 했을 테니 상황은 더 안 좋았을 것이다.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침구, 추나요법 등 한의진료가 통증감소, 관절가동범위증가에 있어 무엇보다 빠른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선수들은 큰 만족감을 보였다. 캄보디아 양궁 선수단 코치의 경우 한국인 감독님과 함께 진료실을 찾은 후 그 효과에 반해 대회 기간 내내 진료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근골격계질환 이외에 선수들을 괴롭혔던 장염을 비롯해 변비 등 소화기계 질환에 대해서도 많은 진료가 이뤄졌다.
진료실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유도의 최광근 선수였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이 덩치 큰 선수는 고등학교 때 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로 시각장애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장애인 유도선수로 전향해 최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던 그는 대회 3주전 우측 무릎 전방십자인대와 내측인대가 모두 파열됐다. 주변에서 당장 수술을 해야한다며 출전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진료와 근육강화훈련만으로 대회를 준비해 끝끝내 영광스러운 은메달과 단체전에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든 의사가 최 선수에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할 때, 본인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며 적극적으로 진료를 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이번 대회에 한의사 팀닥터로 참여한 장세인 원장이었다.
대한스포츠한의학회 부회장으로 2010년경 장애인 선수들을 진료하며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이천훈련원 등에서 여러 장애인 선수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장세인 원장은 최광근 선수와의 인연도 8년이 되어간다.
사실 이번 대회 기간 내내 한의진료실을 찾은 선수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장세인 원장에게 진료를 받아와 장 원장의 진료에 대한 신뢰가 매우 두텁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원래 이번 대회에 한의사는 팀닥터로 포함될 계획이 없었으나 선수들의 강한 요청이 이어져 합류하게 됐다고 한다.
약 10년의 세월로 형성된 환자와 의사와의 신뢰 관계. 이 정도면 ‘주치의’라 부르기에 손색없지 않을까.
나는 ‘실제 진료현장에서 장애인들의 한의약적 건강관리 방법과 장애인들의 한의약에 대한 인식정도 확인, 이를 바탕으로 한 바람직한 장애인건강관리의 방향 모색’이라는 그럴 듯한 목표를 갖고 ‘진료지원’이라는 명목하에 이 곳 자카르타에 오게 됐다.
그래서 진료를 받는 선수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장애인주치의제라고 들어보셨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아니요” 혹은 “그게 뭐에요?”
어떤 선수의 경우 “홍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모르면 내 주변은 아무도 모르지” 하며 구체적인 홍보방안까지 제시해 주기도 했다.
장애인주치의제는 장애인의 건강관리를 위해 올해 5월부터 시작된 시범사업으로 의료취약계층인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진 제도다.
장애인의 건강관리라는 매우 좋은 취지로 시작된 사업임에도 수요자인 장애인들에게 홍보조차 잘 되지 않았다니, 뭔가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정부의 홍보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사자인 장애인이나 의사 입장에서 현 사업에 대해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책을 수립할 때 수요자가 자신에게 실제로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선택해 제공받을 수 있도록 의료선택권을 확대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아쉽게도 한의사는 현재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다행히 최근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의사의 장애인주치의제 참여를 약속했다.
늦었지만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환자의 심신 전체를 살피는 진찰 방식, 충분한 상담을 통한 환자에 대한 깊은 이해 등 주치의로서 큰 강점을 갖는 한의사의 참여가 어쩌면 현 제도를 보완하는 최우선적 선택이 돼야 할 것 같다.
한의사가 장애인주치의제에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될지는 앞으로 주무부처와의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그 중심에는 수요 당사자인 장애인이 있고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한의진료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진료실에서 느꼈던 가장 아쉬웠던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진료실은 접근성이 용이한 1층이 아닌 선수촌 5층에 위치해 선수들이 진료실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진료실 출입구가 너무 좁아 휠체어를 탄 선수들이 진료실로 진입하는데 큰 불편을 겪었다.
현재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등 편의시설에 대한 개선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고 의료기관의 경우에도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한 시설마련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자카르타 아시안 패러게임은 이에 대한 개선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한편으로는 의료기관을 이용하기 쉽지 않은 중증 장애인을 위한 방문진료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절감케 한 계기가 됐다.
에필로그
“여기 지도 좀 봐요. 지금 이 방향으로 가는게 맞나요?”
더듬더듬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영단어들의 조합을 인도네시아인 택시기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계속 웃는 거야?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자카르타 한복판, 앞뒤로 꽉 막힌 도로 위, 하늘색 자동차 안에 갇힌 채 택시기사와 씨름하던 나는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가는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부러웠다.
출발 전 구글맵은 내 목적지인 숙소가 분명 차로 13분 거리에 있음을 알려주었건만 나는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택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도 숙소입구가 아닌 숙소 주변에서. 그리고 구글맵은 다시 한 번 나를 좌절시켰다. 분명 이 스마트한 친구는 여기서 숙소까지 도보로 5분 거리라고 알려주었건만, 이내 현실에 없는 가상의 이동경로였음을 깨닫게 해줬다. 고지는 바로 이 길 건너편 저기에 있는데 나와 그 곳 사이에는 차와 오토바이로 가득찬 6차선 도로가 있었고 주변에 횡단보도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걷고 걷고 또 걸어서 겨우 만난 육교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하지만 내 목적지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마다 아랫배는 아침부터 시작된 장염증상으로 부글거렸고 두 다리는 평소 운동부족을 탓하듯 부들거렸다.
그렇다. 택시기사가 내 말을 좀 알아들어줬으면, 저 육교가 저기가 아닌 여기에도 있었다면, 하는 아쉽고 애타는 마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장애인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