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학교 교수
중의학 분야에서 최근 1년간 게재한 SCI 논문의 숫자가 한국 한의학이 여태까지 게재한 SCI 논문의 총합보다 많다고 한다.
이미 중의학은 우리에게 넘사벽이 되었다.
어찌 이리 푸르고 맑을 수가 있을까? 베이징의 가을 하늘과 공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달 17~19일 베이징의 釣魚臺에서 제5회 Taihu Forum(太湖世界文化論壇)이 열렸다. 2년마다 한 번씩 장소를 옮겨가면서 열리고 있다. 蘇州 杭州 上海 마카오에서 열렸다. 이번 개회식에는 왕천(王晨) 중국중앙정치국 위원이 主賓으로 시진핑 주석의 축하 메시지를 대독했다.
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국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한 포럼이다. 중의학 외 5개 분야로 나뉘어 열렸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한 분과 필자가 참석했다. 백여 명의 외국 초청 인사 가운데 일본은 한 명도 없고 미국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최 측의 심중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전체 회의에서 중화권의 Google Arts & Culture project를 담당하고 있는 구글 부사장의 프레센테이션은 이례적이고 또 인상적이었다.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영상과 발표였다. 중국 내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열리지 않는다. 그의 발표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로 하드 월(hard wall)을 뚫으려는 몸부림이다. 뚫기보다는 스며들고자 하는 것이다. 세월이 가면 열린다.
중의학계 원로의 열정적 모습서 위대함 엿보여
중의학 세션에서는 故宮博物院(紫禁城)에 故宮硏究院中醫藥文化硏究所(The Palace Museum Research Institute’s Chinese Medicine Culture Study Research Institute)를 개소하는 의식도 함께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 이탈리아 전 총리도 참석했다.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왕용옌(王永炎) 中國工程院 院士와 천커지(陳可冀) 中國科學院 院士와의 재회였다. 두 분 다 80대 중후반의 원로시지만 왕 원사님은 필자를 반기면서 10년 전 WHO에서 중국의 臨床診療指南 프로젝트를 지원해주어 고마웠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으셨다.
고령에 병색이 완연하지만, 직접 쓰신 원고를 열정적으로 발표하는 모습에서 원로의 자세와 그 위대함을 볼 수 있었다. 양복바지 아래로 입원 환자복이 살짝 내비쳤다. 아마도 입원하고 계시다가 참석하신 듯하다. 천 원사님도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갑게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신다. 中西醫結合과 瘀血로 여러 차례 뵈었던 어른이시다. 그 외에도 네 분의 國醫大師가 자리를 함께했다.
왕 원사님의 발표에 이어 독일의 파울 운슐트(Paul Unschuld) 박사가 자신의 中醫 書籍 英譯에 관한 견해와 현재 진행하고 있는 《本草綱目大辭典》사업을 소개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언어학자이며, 이미 《素問》 《靈樞》 《難經》 《銀海精微》등 서적을 英譯한 바 있다. 발표 가운데 중국사회과학원의 故 루오시원(羅希文) 연구원이 했던 《본초강목》 번역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다. 오염시켰다고 표현하였다.
루오 연구원은 《東醫寶鑑》도 영역하였는데, 필자도 운슐트박사와 다르지 않은 생각이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주어진 목표에 품질과는 상관없이 벌렸던 어처구니없는 작업들이다. 11월 7~9일 마카오에서 열리는 ICD-11 관련 WHO 회의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 학술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그저 정치적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나 스스로 루저라고 하는 사람들 있어
같은 세션에서 발표했던 香港浸會大學 中醫學院 원장인 루아이핑(呂愛平) 교수는 필자의 WHO 재임 시절부터 ISO/TC249에서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적군으로 여러 차례 만났던 사이이다. 이번에 서로 공감한 것은 일단 전통의학이 ICD-11에 진입했지만, 내용상으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제도적 정치적인 단계에서는 정부가 움직이지만, 내용은 정치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판을 깔고 전문가들이 그 위에서 춤춰야 한다.
회의 기간 만찬과 오찬이 모두 釣魚臺에서 제공되었다. 배정된 옆자리에는 운슐트 박사 부부가 앉는다. 덕분에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화제는 단연 최근 남북한 관계이다. 필자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과거 북한 정권과 김정은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장마당이 활성화되고 무역제재의 강화가 김정은이 비핵화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있다.”
또 “통일이 될 것이냐”고 묻는다. “글쎄, 북한이 지금 미국에 체제 안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분간 통일을 안 하겠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나라는 당신네 나라처럼 통일을 위해 꾸준한 준비를 해오지도 못했다. 정권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독일이 통일을 위해 오랫동안 꾸준한 노력과 준비를 하였으나 통일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동독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루저(loser)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답했다. “세계 어느 곳에나 스스로 루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메르켈 총리도 동독 출신인데. 결국은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가 속한 집단이나 그 나라도 자랑스러울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들은 무엇이 자랑스러울까?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중의계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회복”
학생부터 교수 초년 시절까지 중의학 서적을 사 모으는 것이 직업이자 취미라 할 만했었다.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중국 어느 도시에 가든 서점과 약국을 들렀었다. 그러다가 십 년 넘게 중국 책을 사보지 않았다. 최근 변증 방제 침구 통합의학 등 관련 작업을 하면서 요즘 중국에서는 어떤 서적들이 출판되는지 궁금했다. 호텔 근처 長安街에 있는 新華書店에 들렀다.
4층의 한 구역을 차지하면서 넘쳐나는 중의학 서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한론 관련 서적만 해도 200여 권은 족히 되어 보인다. 방제학도 마찬가지. 중의대에서 배우는 교재도 통일된 체제와 방식으로 수십 권에 달한다. 이뿐이 아니다. 중의학 분야에서 최근 1년간 게재한 SCI 논문의 숫자가 한국 한의학이 여태까지 게재한 SCI 논문의 총합보다 많다고 한다. 이미 중의학은 우리에게 넘사벽이 되었다.
“아, 이제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분명한 것은 우선 중국 중의계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한의계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정확하게 서로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기대하는 찬란한 시절은 후손 후학들에게 넘기고 우리들은 그리로 가는 징검다리 돌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釣魚臺 위로 짙푸른 가을 하늘, 오늘의 중국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