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와 삼국시대의 의학
『삼국유사』, 僧醫 혜통은 신문왕의 등창 치료
속의의 범주가 아닌 세상의 질고 고치는 대의
올해도 어김없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곳곳에 연등 의식이 분주하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천오백여년 세월이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려가 모두 불교국가였으니 불교의약이 없을 리 만무하건만 의학사 분야에서 아직껏 불교의학의 대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이다.
근래 중국에서는 불교를 종교나 사상, 철학적 입장에서 국한하지 않고 종교의학적인 측면에서 탐구한 연구성과가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몇몇 단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불교의학의 성격이나 치병방법이 자세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아쉬움을 달래길 없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한 기념으로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능화(李能和·1869~1943)의 역작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전하는 불교의약설화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승려 혜통(惠通)은 신라시대의 중기 신문왕~효소왕대에 활약했던 인물로 중국에 건너가 밀교승인 무외삼장(無畏三藏), 혹은 선무외(善無畏)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애초에 불가에 입문하게 되는 동기 또한 매우 특이하다. 그는 속세에서 경주 남산 기슭 은천동(銀川洞) 어귀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집 근처 시냇가에서 놀다가 물가에 사는 수달을 잡아 그 고기를 먹고 뼈를 뒷동산에 버렸다.
僧醫로서의 혜통의 의약설화 여러 가지 전해지고 있어
다음날 새벽, 그곳에 가보니 수달의 뼈가 보이지 않아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수달이 살던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그 안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뼈만 남은 수달이 어린 새끼 다섯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고서 크게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함부로 살생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고 이적(異蹟)을 보여주어 경외감을 주기 위한 설화적 장치라 하겠지만 승의(僧醫)로서 혜통이 시작부터 매우 남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혜통은 해동진언종의 개조(開祖)로 밀교승 밀본(密本)의 뒤를 이어 세상을 주유하면서 사람을 구원하고 교화와 해원 사상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승의로서의 혜통의 의약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그 중 하나는 신문왕 때의 일이다. 임금에게 등창이 생겨 혜통에게 치료해 주길 요청하였다. 혜통이 찾아와 주문을 외우자 등창은 금새 나았다. 혜통은 왕에게 그 병의 원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인성 전염병 신통한 스님의 願力을 빌어 해결하려
“폐하는 전생에 재상으로 있으면서 양민인 신충(信忠)의 죄를 잘못 판단하시어 종으로 삼았기에 죽은 신충이 원한을 품게 된 것이고 신충이 환생할 때마다 보복하려 하는 것이니 이 등창 또한 그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절을 세우고 명복을 빌어주십시오.”
신라 후기 골품제의 폐단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분노를 사원 건축과 종교적 교화를 통해 화해시켜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 그가 단지 상습질환이나 다스리는 속의의 범주에서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질고를 고치는 데 주력한 대의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치병 사적은 유학 갔던 당나라에서도 이어져 신라로 귀국할 때까지 이어진다. 당나라 고종의 공주가 병이 들자 혜통에게 왕진을 청하였다. 공주의 병이 교룡(독룡·毒龍)의 장난임을 알아차린 혜통은 멀리 떨어진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흰콩 한말을 은그릇에 담아두고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흰콩들이 흰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되어 병귀와 싸웠으나 이겨내지 못했다. 다시 금그릇에 검은 콩 한말을 담아 두고 주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을 입은 군사가 되어 함께 싸우게 하니 독룡이 이겨내지 못하고 달아나 공주의 병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의 병은 병귀를 퇴치하여 치료하였으나 이에 앙심을 품은 독룡은 신라에 도망 와서 변란을 부려 앙갚음을 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혜통을 청해 다시 돌아와서 구제해 주길 청하였다. 어린이 동화에도 소개되는 구구절절한 설화의 내용을 모두 옮길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나라의 질고를 구하기 위해 문무왕 5년에 귀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를 두고 문학에서는 대개 불교와 용신(龍神)의 대립구도로 해석하여 사금갑(謝金匣 ) 설화와는 반대로 불교의 우위 구도를 이룸으로써 토착신앙이 외래종교인 불교에 굴복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필자의 머릿속엔 혹시 중국에서 시작한 수인성 전염병이 신라 땅에 까지 두루 퍼져 신통한 스님의 원력(願力)을 빌어 해결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이 떠오른다.
스님이 악귀를 물리칠 때 사용했던 독경(讀經)과 주문(呪文), 부적(符籍) 같은 방법은 무술(巫術)과 도교, 의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기에 하나의 영향권 안에 가둬두기 어려운 성격의 것들이다. 하지만 수당시기에 걸쳐 승의, 혹은 도사들의 신통력에 힘입어 크게 유행했던 이러한 기주(祈呪) 요법들이 불교와 도교의학의 일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