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憲泳 자신의 대표 저작인 『(應用自在)通俗漢醫學原論』은 한의학 부흥 논쟁이 한창이던 1934년의 말에 출간하게 된다. 『通俗漢醫學原論』은 해방 후에도 한의학 입문자들에게 베스트셀러로 널리 읽혀져서 乙酉文化社, 醫門社, 眞玄, 學林社, 學園社 등의 출판사를 거치면서 최근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재 간행되고 있다.
언론 및 잡지에 발표된 글 가운데 한의학 임상에 필요한 내용을 모아서 『民衆醫術理療法』(1935년),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1937년),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1938년),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1939년),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1941년) 등이 단행본으로 東洋醫藥社에서 간행하였다. 특히 이들 5종의 서적은 해방 후 1955년에 杏林書院에서 한정판으로 각각 重刊되었다가 1963년에 합본으로 묶여서 『東洋醫學叢書 : 五種』으로 간행되었다.
趙憲泳과 함께 李乙浩, 申佶求, 姜弼模 등이 함께 벌인 한의학 부흥 논쟁에 대한 글은 東西醫學硏究會에서 자체 발간한 『東洋醫藥』와 東亞日報, 新東亞, 中央時報 등의 언론에 게재되었는데, 이 기고문들을 朴季祚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1942년에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全北漢醫藥組合)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자신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物質文明은 어데로』(日月書房)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趙憲泳은 인류의 역사를 물질문명시대와 정신문명시대로 양분하고 당시의 식민지 상황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의 소산이며, 정치적으로는 다수합의에서 소수독재로, 文治에서 武治로 악화된 결과로 보았다.
趙憲泳은 이 당시 대부분의 저서를 스스로 출간하였는데,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고 나서 1932년 金永勳을 만난 이후부터 대략 1934년까지의 사이에 서울 낙원동에 東洋醫藥社를 설립하여 『(應用自在)通俗漢醫學原論』, 『民衆醫術理療法』 등을 출간하였다. 이후 東洋醫藥社는 관훈동으로 옮겨져서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을 출간하였고, 다시 명륜동을 옮긴 이후에는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 등을 출간하였다. 1936년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日月書房은 팔판동에 위치하였고 대표는 趙憲泳의 차남으로 청록파 시인인 趙芝薰(본명은 東卓)이었는데, 이곳에서 『物質文明은 어데로』가 출간되었다. 그밖에 東洋醫藥社에서 『傷寒新論』, 『良方集解』, 『東醫診斷學』 등을 출간 예정이었으나 실제 출간되지는 않았다.
또한 趙憲泳은 대중매체에 매우 활발하게 기고 활동을 하였는데, 이미 1932년 朝鮮理療會를 창립할 당시부터 이 해에 「民衆保健과 理療法」(朝鮮日報 3월), 「봄을 타는 이는 이러케 하시오」(東亞日報 5월) 등을 연재하였다. 1933년 초에는 朝鮮理療會 명의로 「가뎡에서 필요한 진단법과 치료법」(每日申報 1월)을 연재하였다. 이후 약 1년간의 공백기를 지나 1934년에 「東西醫學의 比較批判의 必要」(朝鮮日報 5월), 「陰陽說의 理論과 實際」(朝鮮日報 5월~6월), 「臟腑論의 新硏究」(朝鮮日報 6월~7월), 「漢醫學論에 대하여 鄭勤陽씨의 평을 읽고」(朝鮮日報 10월~11월) 등을 연재하였다.
1935년에는 자신이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東洋醫藥』이 1월부터 5월까지 제3호를 발간한 이후 폐간되었는데, 이 잡지에서 「漢方脉學의 新硏究」(1월, 3월, 5월), 「本草藥理學과 嘗百草以制藥說」(1월), 「李濟馬四象醫論抄錄」(1월, 3월), 「漢藥法製(修治)는 왜하는가」(3월), 「本草藥理學과 氣味論」(3월), 「(張介賓)景岳全書演義」(3월, 5월), 「疾病의 原因」(5월) 등을 연재하였다. 「漢方脈學의 新硏究」라는 글에서는 脈學의 전반에 관하여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本草藥理學과 嘗百草以制藥說」, 「本草藥理學과 氣味論」, 「漢藥法製(修治)는 왜하는가」 등에서는 氣味論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修治法을 사용하는 범위와 간략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張介賓)景岳全書演義」에서는 張景岳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그 이론이 精簡明確하여 현대의 과학적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정리 소개하게 된 것이라 밝히고 있다. 또한 「李濟馬四象醫論抄錄」의 해제에서는 李濟馬에 대하여 중국에서 온 것을 盲從墨守하는 폐단을 벗어나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신학설을 제창한 것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疾病의 原因」에서는 病因을 내적,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도식화하였다.
1935년에는 대중 일간지와 잡지에 「여자의 냉증은 왜생기나」(東亞日報 1월), 「陰陽五行說에 對하야 天台山人의 蒙을 啓함」(東亞日報 3월), 「신경쇠약」시리즈(朝鮮日報 5월), 「姙婦는 왜 신 것을 조하하나」(東亞日報 6월), 「까딱하다가는 더위를 먹습니다」(東亞日報 7월), 「장질부사는 그러케도 무서운 병인가 민간치료법과 예방법」(東亞日報 9월), 「漢方醫學의 危機를 앞두고」(『新東亞』 10월), 「四象醫學에 對하야」(『新東亞』 10월), 「胃膓病의 漢方療法」(『新東亞』 11월), 「肺病의 漢方治療法」(『新東亞』 12월) 등을 연재하였다.
1937년에는 「人蔘과 鹿茸 왜 靈藥이라 하는가」(東亞日報 6월), 「우슨 듯하면서 맘 놀수 없는 각기와 부증」(東亞日報 9월), 「이 절기에 제일 만흔 감기와 토사증」(東亞日報 9월), 「잘못하면 죽는 토사의 증상」(東亞日報 9월), 「날이 치우면 만허지는 허리아픈 증세」(東亞日報 10월) 등을 연재하였고, 1938년에는 「이번 겨을에 유행하는 감기의 치료법」(東亞日報 2월), 「일은 봄부터 만히 나는 중이염 치료법」(東亞日報 2월), 「사망통게를 통해서 본 페결핵환자」(東亞日報 7월), 「백약이 무효하다는 백일해의 치료법」(東亞日報 9월), 「겨을이 되면 고생하는 해수천촉 치료법」(東亞日報 12월) 등을 연재하였다.
1939년에는 대중매체의 기고가 줄어서 東亞日報에 「한방으로 본 발진지부스 원인과 예방치료법」(東亞日報 4월), 「부인병에 제일 만흔 화와 냉의 증세」(東亞日報 11월) 등을 연재하였을 뿐이다. 그 대신 이 시기에 漢方 전문 잡지에 꾸준히 기고를 하였는데 『漢方醫藥』, 『東洋醫藥』 등에 게재되었다. 『漢方醫藥』은 1935년부터 간행된 『忠南醫學』이 1937년 1월부터 명칭을 바꾸어 1942년 제50호까지 발행된 잡지이다. 여기에 실린 趙憲泳의 글 전체에 대한 자료 확보가 어려워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忠南醫藥』에 「本草藥理學과 氣味論」(1935년 12월), 「漢方脈學의 新硏究」(1936년 1월 20일), 「胃膓病의 療法」(1936년 3월, 5월), 「肺病治療에 관한 몃가지」(1937년 1월 20일), 『漢方醫藥』에 「神經衰弱症 治療法」(1938년 8월, 9월, 10월), 「痢疾의 證과 治療」(1939년 8월), 「痔疾의 證과 治療」(1939년 9월), 「婦女의 火와 冷」(1940년 1월), 「小兒病治療法(二)」(1942년 11월)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1939년 7월에 창간된 東洋醫藥協會의 『東洋醫藥』 제3호에는 「洋醫學徒의 漢方醫學觀」(『東洋醫藥』 9월)이 게재되었다.
1940년대 초부터는 종합 대중 잡지인 朝鮮春秋社의 『春秋』에 주로 기고하였는데, 「性格과 運命」(1941년 3월), 「體質과 性格」(1941년 6월), 「李聖鳳, 趙憲泳 對談 - 東西醫學上으로 본 長壽强壯의 秘訣」(1941년 11월), 「肺病의 豫防과 治療」(1942년 10월~1943년 2월), 「鄕藥集成方의 重刊을 보고」(1943년 3월), 「胃膓病의 攝養과 治療」(1943년 3월~6월), 「假死 이야기」(1943년 7월), 「神經衰弱症의 原因과 治療」(1943년 9월~11월), 「婦人病의 攝養과 治療」(1944년 1월~8월) 등이 그것이다.
※ 『忠南醫藥』, 『漢方醫藥』 등에 실린 趙憲泳의 기고문에 대한 정보와 내용을 제공해주신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김남일 교수님과 재단법인 아단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