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본문 첫장,
“소며 말이며 양이며 돼지며 서로 전염하는 병 고치는 방문이다.”
최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동의보감 제주전시회도 살펴보고 사암침봉사단에서 실시하는 무료진료도 지원할 겸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별미라는 고기국수와 돔베 고기집을 찾았다. 예전에도 몇 차례 제주 특산 흑돼지고기를 맛보고자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다닌 적이 있고 제주에 가면 한번쯤 들러보게 되는 제주만의 독특한 똥돼지 사육방식의 전통을 흥미롭게 여긴 적이 있다.
언젠가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들렀을 때에도 추사가 지냈다는 적소(謫所) 뒤란에 보존된 통시를 본 일이 있다. 여기에 돼지를 함께 길렀다는데 산간지역에서는 문간에 변소를 설치하고 돼지를 길러 외부인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알렸다고 하니 돼지와 인간이 절묘한 방식으로 공존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육지에서 보기 힘든 담백한 돼지고기 육질을 즐기면서도 중부이북은 돼지열병을 막느라 날마다 뉴스의 초점이 되는데, 제주는 바다가 가로막혀 인마의 이동이 어려우니 당분간 전염될 걱정은 적구나 하고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란 금시초문의 특이한 병명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 돼지열병은 애초에는 아주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전해진 것이라 하는데 중간에 어떤 경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나라에 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북한을 거쳐 한반도로 남하하지 않았나 싶은데, 현재는 남북간 군사분계선에 묶여 있는 셈이다.
방역당국은 DMZ 철책 밖에 1미터 높이의 고압철책을 2중으로 설치하여 열병에 감염된 멧돼지가 먹이를 찾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대책을 세운 모양이다. 그나마 이 방호벽이 열병에 걸린 돼지가 후방지역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수만 마리 사육돼지가 지근거리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 당하는 일을 미연에 막아줄 것이고 양돈농가에게는 희망을 전해주는 복음이 될 것이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란 금시초문의 특이한 병명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지내다가 예전에는 이런 돼지가축병이 없었을까 하는 질문에 자문자답하는 심정으로 고의서를 뒤져보기로 하였다. 마침 오래 전부터 소개 글을 한번 써보리라 맘먹다가 가축에 대한 선지식이 적어 그만 내쳐두었던 수의학 책이 하나 뇌리에 떠올랐다.
서명은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라는 다소 긴 이름이다. 또 다루는 대상도 인간이 아니고 소, 말, 양, 돼지, 사슴 등 발굽달린 가축들을 싸잡아 다루고 있으니 매우 특색 있는 전통수의서임에 틀림없다. 2010~2011년 한국에서 소와 돼지 350만 마리를 생매장했던 구제역의 악몽을 떠올린다면 이 책이 얼마나 소중한 기록인지를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1541년에 작성된 권응창의 서문에 의하면 이 가축전염병치료방을 교서관(校書館)에서 19건을 인출하여 그 중 10건은 본조(本曹/권응창이 좌승지로 있으면서 적은 글이므로 승정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및 전생서(典牲暑), 사축서(司畜署), 오부(五部), 전의감, 혜민서에 각각 분배하고 나머지 9건은 개성부를 비롯하여 8도에 나눠 보내서 각도로 하여금 즉시 판목(板木)에 새겨 많이 인출하여 각 관아에 나눠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가축 전염병 치료 교본
방역을 담당한 해당 각 관서와 지방관아에 급히 내려 보내 대응토록 조처한 것이다. 특별히 이 가축전염병치료방은 이두와 언문 2가지로 함께 기록하였으며, 약명에는 향약명(鄕名)을 병기하여 놓은 것이 특색인데, 아마도 지방 관아의 아전들과 향촌의 부로(父老)들이 널리 읽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알려진 의약방서 가운데 돼지 전염병에 대해 기록한 전문방역서는 아마도 이것이 유일할 듯한데,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이라고 적힌 본문 첫 장의 권수제 아래에 다음과 같이 한글로 된 풀이가 달려있다. “소며 말이며 양이며 돼지며 서로 전염하는 병 고치는 방문이다.”(필자 현대 표기로 옮김)
곧 가축전염병인 셈인데 날짐승이나 물고기는 없고 모두 발굽을 가진 짐승들이라 구제역이나 이번에 유행하는 돼지열병 같은 동물전염병이 이에 해당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초점이 되는 주안점은 이 병이 서로 급속하게 전염되어 퍼지는 돌림병이라는데 있다. 이를 책에서는 염역병(染疫病)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있다. “염역병은 하나 앓고 둘, 셋이 아파 서로 전염하는 병이다.”
처방편은 출전에 따라 몇 조문씩 구분되어 있는데, 『본초』(아마도 경사증류비용본초를 말할 것임.)에서 15조문, 『우마의방(牛馬醫方)』에서 2조문, 기타 『신은(神隱)』에서 4조문, 『사림광기(事林廣記)』에서 4조문이 선용되었다. 또 권미에는 사육방법에 있어서 주의점과 특기사항을 역시 여러 문헌에서 인용해 번역해 두었는데, 『산거사요』에서 양을 키우는 축사를 청소하고 청결하게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당시에도 가축의 생육환경과 위생이 필수조건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편민도찬』, 『두창경험방』 등 痘瘡 열독 처방
한편 본문 가운데 돼지열병에 참고할 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돼지가 전염병에 걸렸거든 무(나복·蘿蔔)나 무 잎을 주어 먹이는 것이 좋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돼지가 즐겨먹는 먹거리로 성질이 서늘하여 능히 그 열독(熱毒)을 낫게 하며, 또한 능히 그 장과 위를 돌려주어(선전·宣轉) 잘 빠져나가게 해준다. 만일 먹지 않으면 구하기 어렵다고 밝혀 놓았다.
또 『편민도찬(便民圖纂)』이란 책을 인용한 대목에서는 돼지 병에 그 꼬리 끝을 째어 피를 내면 곧 낫는다고 하였다. 돼지꼬리에서 피를 내는 방법이 나오니 불연듯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허준이 지은 『두창집요』에 등장하는 저미혈(豬尾血) 혹은 박진희 『두창경험방』에 등장하는 저미고(猪尾膏)가 바로 그것이다. 두창의 열독을 풀어주는 처방으로 돼지의 꼬리 끝을 찔러 출혈시킨 다음 그 피를 해열제로 응용하였으니 사람에게나 돼지에게나 열병에 이래저래 돼지 꼬리의 피가 유용하게 쓰인 셈이니 묘한 인연법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대응과 철저한 방역대책을 실시하여 성공적으로 돼지열병을 막아내고 있다는 방역당국의 말이 분명 허언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배를 채우기 위해 길러졌다가 감염이 우려된다는 이유만으로 헛되이 살육되는 현실 속에서 돼지열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볼 순 없을지, 안타까운 마음에 애꿎은 책장 갈피마다 이리저리 뒤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