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윤 대전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대전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공지능(AI)의 발전이 의료 현장과 교육 전반에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미 서양의학에서는 AI를 기반으로 한 진단 보조 시스템, 영상 분석, 환자 맞춤형 치료계획 수립 등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의학 교육 또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진화하고 있다.
의과대학에서는 디지털 트윈 기반 시뮬레이션, AI 기반 해부학 플랫폼, 그리고 가상현실(VR)을 활용한 술기 교육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교육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의학교육은 어떠한가? 수천 년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한의학은 여전히 방대한 고전 문헌과 이론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육 또한 이론 중심의 강의식 전달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일부 대학에서는 플립러닝이나 사례 기반 수업 등 교육 혁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변화의 속도는 더딘 편이다.
그러나 AI가 일상이 되는 시대에, 한의학교육이 과거의 방식에 머문다면 새로운 세대와의 간극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의학교육, 무엇이 변화해야 할까?
한의학교육이 변화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한의학교육의 학습 목표 자체가 재설정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한의학 이론을 충실히 암기하고 숙지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학습자는 단순 지식 전달을 넘어,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하며 임상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제시하는 복합적인 진단 데이터를 어떤 한의학적 개념틀로 풀어낼 수 있는가, 디지털 진맥 장치의 수치를 어떻게 임상에 반영할 것인가 등은 단순한 기술 숙련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술을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임상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영역이며, 이에 맞춘 교육 커리큘럼 개편이 필수적이다.
둘째, 교수자의 역할이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수는 지식의 전달자였지만, 앞으로는 ‘학습 설계자’이자 ‘디지털 교육 콘텐츠 개발자’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AI 기반 가상환자 시나리오를 활용한 수업, 디지털 진단도구에 대한 비교분석 과제, 전자차트 기반의 증례 토론 등은 모두 교수자의 기획 역량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교수들이 여전히 강의 자료의 PPT만으로 수업을 운영하며, 디지털 교육도구의 활용이나 기술적 접근에 익숙하지 않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교수자 대상의 디지털 교육 리터러시 연수, 한의학 특화 AI 교육 도구의 공동 개발, 교육자 간의 공유와 피드백 문화 조성이 병행되어야 한다.

한의학 전통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고민
셋째, 학습자 중심의 학습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AI 기반 학습은 학습자 개인의 수준과 속도에 따라 맞춤형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침구학 실습에서 AI 기반 시뮬레이터는 학생의 자세, 자침 깊이와 방향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숙련된 교수가 항상 옆에 있지 않아도 반복 학습이 가능해진다.
또한 AI 기반 학습 분석 시스템은 학생의 학습 패턴을 추적하여 어떤 개념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시각화해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맞춤형 학습 지도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기술적 기반은 전통적인 일방향 교육을 넘어서, 학습자의 주도성과 자기조절학습 능력을 키우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실제 AI 기반 한의학교육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최근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가상의 환자를 생성하고, 그에 따라 증상, 병명, 변증 등을 도출하는 과정을 학습자가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교육모델이 발표된 바 있다. ‘Gen-SynDi’(Generative-Synthetic Diagnosis)라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변증-진단-처방-추론 과정 전반을 경험하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의 흥미와 자기주도성을 자극하는 측면에서 교육 효과 역시 클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기존 강의 중심 교육을 넘어 AI 기반 임상 추론 훈련으로 나아가는 혁신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넷째, 한의학의 전통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고민해야 한다. AI는 표준화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반면 한의학은 개인별 체질, 병리, 환경을 중시하는 개별화 의료를 지향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지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충돌이 아닌, 보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AI를 통해 다양한 환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패턴을 정형화하는 과정은 오히려 한의학의 변증 이론을 객관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AI는 교육과 임상 문화를 바꾸는 패러다임
변화에는 언제나 저항이 따른다. 특히 전통을 중시하는 한의학 분야에서는 ‘AI가 한의학을 왜곡하거나 단순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시대의 변화에 눈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을 지키려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교육이다.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교육과 임상의 문화를 바꾸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한의학교육이 이 흐름을 선도할 것인가, 아니면 뒤따라갈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내리는 교육적 판단에 달려 있다. 지금이야말로, 한의학교육이 전통을 품은 미래로 나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