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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항일 무장투쟁 이끌었던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무장투쟁 이끌었던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김명섭 교수, ‘한국의사학회지’에 논문 게재…다양한 투쟁사례 소개
직접적인 무장투쟁 및 군의 활동, 군자금 모집 등서 다양한 활동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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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오는 8월15일 ‘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가운데 본란에서는 ‘한국의사학회지’에 게재된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한의계 독립운동가들(김명섭·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이란 제하의 논문 소개를 통해 한의사 출신의 민족지사들 중 항일 의열투쟁을 비롯한 만주 독립군 활동 등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한 사례를 소개한다.

 

한의사 출신 민족지사들은 1919년 3·1운동은 물론 비밀결사 활동, 만주 독립군 및 의열투쟁 등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의사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한약방이나 한의치료를 받은 여관 등을 비밀연락과 군자금조달의 장소로 활용할 뿐 아니라 치료나 약재 구입을 명분으로 지역 마을과 야산을 이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전문직종의 특수기술을 활용한 중요한 독립활동의 하나였다.

 

한의사 강우규의 의열투쟁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단원으로서 남대문 역사에서 신임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다.

강우규 의사는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한 이후 같은해 9월2일 남대문역에서 신임 조선총독인 사이토 총독 일행이 쌍두마차에 오르는 순간에 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다. 폭탄은 비록 총독이 탄 마차를 손상시키데 그치고 척살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수행원과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냈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식민지 통치정책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을 문화정치로 호도해 새로운 통치질서를 확립하려는 일제당국의 지배정책의 파탄을 예고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민족독립의식을 재확인해 주는 항일 무장·의열투쟁의 한 모형을 제시해 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의사 김관제의 의열단 지원 활동

김관제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 출생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월강(月岡)이다. 1910년대 경남 김해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김관제는 1909년 안희제·남형우·윤세복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 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으로 나라를 잃게 된 김관제는 만주로 망명, 동지들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세우고 교포 자제에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당시에는 경남 지역으로 파견돼 경남 동부 지역인 밀양·부산·김해·마산 등지를 순회하며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한편 1920년 의열단이 ‘제1차 암살파괴계획’을 수립해 실행할 무렵 김해에서 의생으로 활동하다가 이 사건에 연루돼 피체됐다. 김관제의 당시 혐의는 의열단 단원으로 국내거사를 기획한 이종암의 각기병을 치료해주며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여겨진다.


또한 김관제는 1924년 대구로 이전, 약전골목에서 복양당한의원을 운영하면서, 1938년에는 대구의생회를 개편해 경북의생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복양당한의원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인사가 드나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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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독립군에서 군의 등으로 활동한 한의사들

우선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 선천군, 철산군에 거주하는 청년들로 구성된 항일 무장독립단체인 ‘독립군보합단’에서는 군의로 활동한 박세정이 있다.


1920년 11월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정보보고서인 ‘비밀결사 대조선독립보합단 검거’ 문서에 따르면, 박세정은 “배일사상을 가진 자로서, 1919년 3월 이후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의주경찰서와 신의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바 있고 석방되었는데, 의생으로서 독립군 보합단의 군의(軍醫)가 되어 단원과 부상병, 환자 등을 은밀히 치료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에서 활동한 심병조와 안형섭도 눈에 띈다.

심병조는 평안북도 선천읍 선북동 출신의 한의사로 창설부터 참여해 서기로 활동했으며, 안형섭도 평안남도 옥천면 북창리 출신의 의생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심병조는 1920년 무렵 광복군사령부의 군기대 부대장에 임명돼 활약한데 이어 1921년에는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활동을 하던 중 평안북도 제3부 형사대에 의해 의주에서 피체,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후 3년5개월만에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심병조는 1924년부터 선천군에서 한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고, 1928년에는 동아일보사 안동지국 기자로도 활동했다. 또한 1938년에는 평안남도 개천에서 신사참배 거부 및 선동자로 지목받아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을 당해 구속된 뒤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3·1운동 이후 한말 간도부윤을 지낸 이범윤이 의병세력들을 규합해 연해주 추풍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에서는 김대용과 박성용이 군의로 활동했다. 대한광복단은 1920년 10월22일 북간도 독립운동단체인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편성돼 청산리전투에서 대승하는데 일익을 담당키도 했다.

이밖에 1919년 4월15일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서구 대화사에서 국내에서 항일의병을 전개했던 박장호·조맹선·전덕원 등이 보약사(保約社)와 포수단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한인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에서도 의생인 강홍상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원직, 임시정부 경성교통국서 군자금 모집 활동

한의사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참여해 군자금을 모집한 지사로는 이원직을 꼽을 수 있다.

이원직은 환자 치료를 위해 자유롭게 지역유지의 집을 방문할 수 있는 한의사라는 직업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를 모집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이밖에도 한의사 출신은 아니지만 의생의 아들로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의술을 바탕으로 독립군 양성과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인 지사로 ‘범정 장형’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장형의 부친은 1914년 평안북도에서 의생면허를 취득한 장창익으로, 사상의학에 기초해 관상과 진맥에 조화가 깊어 선천뿐 아니라 평양, 신의주, 서울, 대구 등지에서까지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장착익의 수입은 그의 아들인 장형의 독립운동 활동에 중요한 밑천이 됐다.

장형은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손병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군자금 조달하는 일을 부탁받고 이후 이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의 독립 군자금 모금과 임시정부 독립청원 운동, 전국 순회강연 활동 등은 대부분 한의사로 위장해 활동했기에 가능했는데, 이로 인해 ‘유사의료행위를 빙자한 사기혐의’로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부친으로부터 진맥과 침술에 대한 기초는 물론 치료술을 배워 많은 이들을 치료한 장형은 이를 통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군자금을 모아 만주 독립군과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밖에 장형은 1932년 중국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해 정미소를 운영하며 농업에 종사했는데, 정미소를 통해 번 돈을 독립군들의 무기 구입을 위한 군자금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장형은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광복을 맞았고, 1946년 7월 환국한 이후 이듬해 11월 단국대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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