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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시선나누기-35] 나의 연주자

[시선나누기-35] 나의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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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아코디언을 메고 나타났다. 양쪽 어깨에 끈을 걸었으니 멘 것이 맞지만 가슴 앞쪽에 악기가 있으니 안은 것 같기도 하다. 작은 몸에 걸친 아코디언 무게가 10킬로쯤 나간다고 했다. 마치 찰싹 달라붙은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 같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아코디언을 어르듯 달래듯 연주할 때 그는 마치 연인을 안은 사람 같기도 하다. 

 

풀무처럼 바람통의 주름을 접었다 펼친다. 오른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왼손이 수십 개의 둥근 버튼을 누르며 가늘고 슬픈 음색의 소리를 뽑아낸다. 눈을 내리감은 그가 주름진 바람통을 은근히 누르다가 마지막에 살짝살짝 흔들 듯이 할 때는 그의 작은 어깨도 흔들린다. 눈썹이 일그러진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다. 그는 온몸으로 음률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장르 상관없는’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신유배기행> 공연 연락을 받고 맨 처음 떠올린 사람이 그였다. 신유미, 유진규, 배일동 세 사람의 예술 기행. 무대에 목마른 그들이 뜻을 합쳐서 전국의 소극장들을 누비겠다고 작심하고 판을 짰을 때, 큰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한 지역을 방문한다. 그 지역의 예술가들을 만난다(장르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한판 난장을 펼치고 논다. 날이 밝으면 다시 다른 소극장을 찾아 떠난다.

 

‘장르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지역 예술가를 추천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실은 난감했다. <신유배기행>이라는 무대의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마임이스트 한 분뿐. 다른 한 사람은 공연 영상만 본 적 있는 판소리 명창. 거기다가 수묵화로 퍼포먼스를 한다는 낯선 사람까지. 그 조합만 해도 낯선데 ‘장르 상관없는’ 지역 예술가들까지 함께한다고 한다. 나도 그 ‘지역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거 참... 마임, 판소리, 수묵화에 시(詩)와 시침(施鍼)까지. 거기에 무엇을 더해야 어울릴까. 아니, 무엇을 더해야 덜 안 어울릴까. 누가 이 이색적인 무대를 기꺼이 함께할까. 

 

그는 120명 사물놀이의 상쇠였다. 예술회관 무대가 견뎌야 할 하중을 걱정해서 180명이 하던 것을 그나마 축소한 게 ‘120명 집단 사물놀이’였다. 굉장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북, 장구, 꽹과리, 징을 잡은 사람들이 줄지어 앉고, 받침대에 올린 북을 선 채로 두드리는 모듬북들이 뒤쪽에 정렬하고, 맨 뒤 중앙에는 대북이 늠름하게 중심을 잡고 섰다. 앉고 서고 빼곡한 그 무대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이 상쇠에게 있는데, 흰 소매에 푸른 비단 허리띠, 비단 머리띠를 나풀거리면서 그는 꽹과리를 치고 무대를 휘저었다. 해사하게 웃으면서.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 좋아하는 사람의 말


그런 그가 제 몸만 한 아코디언을 메고 나타난 것이다. 아코디언 주름 같은 검은 주름치마를 입은 그가 무대로 나온다. 아마추어의 긴장과 풋풋한 기쁨이 얼굴에 묻어 있다. 모인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을 만한 곡을 연주하겠노라 말한 그의 손에서 귀에 익은 곡들이 흘러나온다. ‘장밋빛 인생’, ‘파리 하늘 아래’ 같은 외국 곡에 이어 ‘봄날은 간다’, ‘낭만에 대하여’, ‘백만 송이 장미’가 흐르고, ‘그때 그 사람’이 나오자 청중의 환호가 커진다. 

 

나는 눈을 감고 듣는다. 발끝으로 리듬을 탄다. 가늘게 떨리는 아코디언 음색은 특유의 쓸쓸함으로 사람을 휘감는다. 바람통의 주름을 누르고 당길 때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가 애달픈 곡조에 붙어 다니면서, 먼 곳으로 흘러가 버리려는 마음을 여기 이곳으로 당겨 놓는다.

 

“처음 아코디언을 배워 보겠다고 혼자서 이걸 연습했어요. 그런데 방법을 모르니까, 이 무거운 걸 메고 서서 연습을 한 거예요. 한참 뒤에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앉아서 하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어쩐지 허리가 너무 아팠어요.”

 

손을 서로 맞잡고 내 앞에서 그가 해맑게 웃었다. 혼자서 피나도록 연습하고 처음 초청을 받아 무대에 섰을 때는 그렇게 떨릴 수가 없더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고 120명을 지휘하던 그 상쇠가 떨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연주 4년 차에 접어든다.

 

“아코디언이 너무 좋아요. 공연을 하면 ‘내가 즐거움을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첫 번째는 내가 너무 좋아요. 연습하는 것도 좋고, 연주하는 것도 좋고. 이 마음을 뿌릴 수 있잖아요, 공연하면. 그게 좋아요.” 

 

그는 연신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재밌어요, 되게 좋아요, 너무 좋아요. 무언가에 흠뻑 빠져 좋아하는 사람의 이런 말을 듣는 일이 살면서 얼마나 될까. 좋다는 사람의 말을 연달아 듣는 동안 내 마음이 따라서 흐뭇하고 좋아졌다. 그는 나에게도 ‘이 마음’을 뿌렸다. 

 

나의 연주자.jpg


그의 연주를 귀하게 대접하고 싶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선생의 음반이다. 평생을 아코디언에 바친 선생을 위해 후배들과 외국 연주자들이 제작을 도왔다고 한다. 새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내가 가진 CD를 그에게 보냈다. 연주가 너무 멋졌다고, 더 멋진 연주자가 되기를 응원한다고 엽서를 썼다. 그에게 가서 그 음반은 더욱 빛날 것이다.

 

<신유배기행>에서 그가 저 검은 주름치마를 입고 나와서 아코디언의 주름을 펼쳤다 접으며 연주하기를 바랐다. 시와 마임과 아코디언이 쓸쓸하고도 격정적으로 어우러지는 무대를 바랐지만, 결국 그를 초대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추어 연주자였지만 내가 사랑한 그의 연주를 귀하게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사정이라 공연료를 지급할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에 그를 부르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는 초보 연주자이지만 나는 초보인 그를, 그의 연주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새로 돋은 연둣빛 싹 앞에서 손 모아 인사하는 마음이었다고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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