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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7일 (토)

감상비평문 <매치포인트>: 우리는 돌을 굴려야 하는 무력한 시지프

감상비평문 <매치포인트>: 우리는 돌을 굴려야 하는 무력한 시지프

이준석 학생(부산대 한의전 한의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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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란에서는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이 최근 원내 학생 및 교직원을 대상으로 의학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개최한 ‘동제신춘문예’ 공모전의 수상작(시, 수필)을 소개한다.


제목만 봐서는 마지막 한 점을 두고 다투는 치열한 스포츠 영화라 예상되는 <매치포인트>는 드라마, 범죄 장르 영화로 인생에 대한 간단하고 반박하기 어려운 통찰을 담고 있다. 

 

영화에 대한 논의가 단순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감독인 우디 앨런의 인생관, 작품관을 먼저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인생관은 그에게 감독상을 비롯한 아카데미 4관왕을 안겨준 1977년 영화 <애니 홀>의 오프닝씬 속 대사에 잘 드러나 있다. “... 두 중년부인이 캣스킬즈산 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이봐, 여기 음식은 정말 형편없구먼.’ 하고 말하자 다른 부인이 되받길, ‘그래, 맞아. 게다가 양도 너무 적어.’ 라고 했지요. 에, 그것이 본질적으로 제가 삶에 대해 느끼는 방식입니다. 외로움과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 찬 그 삶은 너무 빨리 끝나버리기도 하죠.” 그는 인생을 비참한 것이라고 본다. 

 

어느 특정 사람과 상황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일생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화 중반부에 이를 뒷받침 하는듯한 대사가 또 나온다. 감독 스스로가 연기한 주인공 앨비가 애니에게 서점에서 말한다. “저는 매우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데이트하려면, 당신이 이쯤은 알아야 할 거 같아서요. 난 인생이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봐요. 끔직한 것 그리고 비참한 것. 딱 두 개의 범주가 있을 뿐이죠. 끔직한 인생은 어, 잘은 모르겠지만 말기 암환자 같은 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 그리고 비참한 인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에요. 그게 다죠. 그래서 당신은 인생을 살아나갈 때, 당신이 비참하다는 걸 감사해야만 할 거예요. 왜냐면 당신은 다행히도 운이 좋아서 그저 비참할 뿐이니까요.”

 

행복한 순간들은 금방 지나가고···

 ‘운이 좋아서’라는 말을 기억해두자. 그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운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애니 홀>이 개봉한지 35년 후인 2012년, <The Talks>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삶에서 행복은 불가능하며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에게 어떤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했다. 삶을 매우 명료하게 바라보면, 꽤 가차 없는 기획이기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면서 행복한 삶을 부정했고 우리 삶의 멋지고 행복한 순간들은 금방 지나가고 실존 그 자체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이게 우디 앨런의 인생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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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곳에서의 저녁식사, 노력 끝에 얻어낸 성취, 심지어 복권에 당첨되는 것까지, 삶에서 멋지고 행복한 순간들은 우리 인생 전체에서 얼마만큼을 차지할까. 그런 순간들은 잠시일 뿐 우리는 실존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투영시킨 환상과 현실간의 큰 괴리

 

그는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알베르 카뮈를 뽑은 적이 있다. 카뮈는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깨어있는 의식, 통찰과 반항으로 인해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디 앨런에게 행복한 시지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시지프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감독의 작품관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사랑, 낭만, 불륜, 불평, 수다, 유머, 중산층 지식인, 재즈 그리고 뉴욕 등으로 대변되는 우디 앨런 작품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현실과 환상 간의 괴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생은 기본적으로 비참하다. 삶이 괴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어떤 환상 속에 자신을 투영하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욕망이 필수불가결하게 작용한다. 특정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환상 속에 자기투영을 실행한다. 그 정도가 약하면 괜찮지만 심하면 문제가 된다. 자신을 투영시킨 환상과 현실 간의 큰 괴리(와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욕망)는 당사자에게 큰 후유증을 남긴다. 

 

우디 앨런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극장을 도피처로 삼는 여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담아냈고,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원작으로 하는 <블루 재스민>에서는 시궁창이 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기저에 깐 채 환상 속에 자신을 투영하는 여자를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원더 휠>에서도 이 주제 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뉴욕을 사랑하는 감독이 대서양을 건너가 유럽에서 만든 작품들이 몇 개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파리와 야경을 배경으로 담았고 <투 롬 윗 러브>에서는 로마의 멋진 건물들과 거리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는 남부 프랑스의 시골 전경을 화사하게 담아낸다. 하지만 <매치포인트>는 런던이라는 배경을 활용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내면과 사건에 집중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매치포인트>는 우리 인생이 비참하다는 감독의 논조에 힘을 싣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페라 배경음악, 등장인물 간의 긴 대화의 부재,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등에서 대부분의 우디 앨런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하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담은 영화는 없을 것이다. 실존으로서의 선택, 운, 욕망, 그의 영화의 키워드 중 사랑, 불륜, 그리고 환상 속에 자기투영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살펴보자.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이하의 내용은 <매치포인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영화는 왔다 갔다 하다가 네트에 맞고 튀어 오르는 테니스 코트의 공을 비추며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누군가 선한 삶보다 운 좋은 삶이 낫다고 한다면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이 운에 좌우한단 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골몰하면 미칠 지경일 테니. 시합에서 공이 네트를 건드릴 때 공은 넘어갈 수도 그냥 떨어질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은 이긴다. 반대의 경우 패배한다.”

 

운과 노력, 무엇이 더 중요한가?

런던으로 이사 온 주인공 크리스는 성공하고 싶어 하는 포부가 매우 큰 테니스 강사로 상류층에 속하고 어울리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그 환상을 이루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런던의 비싼 집세를 걱정하면서 오페라를 듣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암시라도 하듯 후반부 크리스의 모습은 <죄와 벌>속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겹쳐 보인다. 곧 크리스는 자신의 수강생 중 상류층 자제인 톰 휴윗과 오페라를 관람하며 친해지고 톰의 여동생 클로이와 교제하게 되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크리스는 톰의 약혼녀인 놀라에게 반해서 계속 추파를 던진다. 

 

그 사이 크리스는 회사를 운영하는 톰의 아버지를 통해 일자리를 얻고 휴윗 가족에게 인정받으며 자신의 환상을 조금씩 실현하기에 이른다. 이와 대비되게 놀라는 미국 출신 배우 지망생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만 번번이 떨어진다. 톰의 어머니는 이런 놀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놀라가 휴윗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모습은 별장으로 놀러간 그들의 의복에서도 드러난다. 

 

결국 별장에서 비가 폭풍처럼 쏟아져 한 치 앞이 안보이고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날씨 아래에서 크리스와 놀라는 불륜을 저지른다. 크리스는 이후에도 계속 놀라에게 치근덕대지만 놀라는 한 번의 실수뿐이었다면서 관계를 이어나가길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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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크리스와 클로이는 결혼하고 톰은 다른 여자가 생겨 놀라와 헤어진다. 잠깐 클로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두 커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크리스와 클로이의 상반된 가치관이 드러난다. 

 

두 다리를 잃은 아버지와 가난한 삶을 살아온 크리스는 성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운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유복하게 자라온 클로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크리스와 결혼하게 된 클로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아마 평생 동안 인생이 노력하는 대로, 자신이 통제하고 선택하는 대로 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크리스 부부는 임신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고 톰과 헤어진 후 얼마 동안 미국에 다녀온 놀라를 미술관에서 크리스가 우연히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다시 전개된다. 다시 모든 것을 가리듯 눈이 오는 날 둘은 불륜 관계를 맺고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의 죄책감은 없다는 듯이 시도 때도 없이 만난다.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으니, 원하던 클로이와의 임신은 소식이 없고 놀라가 덜컥 임신 소식을 알린다. 클로이와의 상류층 인생을 꿈꾸던 환상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놀라가 있는 환상을 꿈꾸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가던 크리스는 그녀의 임신으로 인해 현실로 돌아온다. 크리스는 운이 없다며 한탄하고 이 사실을 클로이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놀라에게는 클로이와 갈라서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투영시킨 (현실이 된) 환상을 크리스가 포기할리 없다. 

 

그는 휴윗가의 별장에서 사용했던 엽총으로 놀라를 쏴 죽이기로 결심한다. 엽총을 빼내 오고 놀라에게 퇴근 후 그녀의 집에서 보자고 한 뒤 그녀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후 마약 중독자의 강도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녀의 옆집에 사는 노부인의 집에 들어가 부인을 먼저 쏴 죽인다. 

 

정황을 만들기 위해 집 안의 약과 귀중품들을 급하게 챙기고 노라를 기다리던 크리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윗집에 사는 청년이 노부인의 집 문을 두드리며 슈퍼에 가는 데 살 것이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일상을 영위하던 실존의 부존재화로 인해 현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극대화되던 장면이다. 크리스는 한 존재를 지워버린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친 숨을 내쉰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곧 청년은 떠나가고 뒤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놀라의 뒤에서 크리스는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 놀라의 이름을 부르고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긴다.


 초반부에 크리스가 읽던 책이 <죄와 벌>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특히 이 시퀀스에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이 크리스에게 겹쳐 보인다. <죄와 벌>을 읽으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과 해당 시퀀스가 상당히 유사하다. 계획적인 살인, 두 명의 여성 피해자(크리스의 경우 엄밀히 말하면 세 명)와 먼저 살해당하는 노부인, 좁은 통로와 쫓기듯 계단을 내려가는 살인자... 두 살인자의 의식과 동기는 유사해보이지 않지만 욕망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동기가 된 범인, 비범인이 구분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스스로가 다른 이들을 초월하고 고도의 지성과 의지를 가진 초인이라는 얇은 허울 아래에는 가난으로 인한 단죄의 욕구, 초인으로서 정의를 쫓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있었다. 크리스의 의식과 동기는 어찌 보면 라스콜리니코프의 것보다 더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순도 100%욕망이었으니. 그러나 두 살인자의 결말은 다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백을 통해 형을 선고 받고 최종적으로 소냐의 사랑을 통해 구원 받는 반면 크리스에게는 구원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은 이긴다

상류층 인생이라는 환상을 지켜낸 그에게 남은 일말의 죄책감이 형상화된 것 같은 피해자의 유령이 보이지만 그 뿐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살인 후 전개되는 선택과 운을 그린 마지막 20분이다.


살인 후 크리스는 테니스 가방에 엽총을 숨겨 알리바이를 위해 계획한 대로 클로이와 영화를 보러 가고 살인에 쓰인 도구도 다시 무사히 갖다 놓는다. 경찰의 수사는 크리스의 계획대로 마약중독자의 강도사건 그리고 놀라는 운 없는 목격자라는 식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클로이도 임신에 성공하면서 모든 것이 주인공의 입장에서 순조로워 보였으나 놀라가 일기를 썼다는 게 밝혀지면서 크리스는 수사 대상에 오른다. 조사받기 전 그는 위장을 위해 노부인의 집에서 가져온 약과 귀중품을 강에 인멸하고 돌아가다가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은 반지 하나를 마저 던지고 돌아선다. 

 

카메라는 날아가는 반지를 슬로모션으로 비추면서 영화의 오프닝씬을 상기시킨다. 날아가는 반지와 강둑에 낮게 쳐진 펜스는 첫 장면의 테니스공과 코트의 네트를 연상시키고 오페라 <맥베스>의 <O figli, o figli miei>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주인공의 불운을 암시하는 듯하다. 반지는 테니스공이 네트에 맞고 튀어 오르듯이 펜스에 맞고 튀어 오른 후 펜스를 넘지 못하고 주인공 쪽 코트, 강둑에 떨어지고 만다. 주인공의 운도 다했고 사필귀정이 실현되는 것일까. 필자가 재개봉한 본 작품을 관람하던 극장 안에선 주인공에 몰입한 관객들이 이 장면에서 터뜨린 탄식을 실제로 들을 수 있었다. 다들 크리스의 몰락을 예상했을 것이다. 

 

오프닝 씬의 내레이션을 다시 보자.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은 이긴다. 반대의 경우, 패배한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바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같은 궤적의 테니스공이라 하더라도 네트에 맞았을 때 결과가 달라지게 할 수 있다. 같은 궤적일 경우 다른 결과를 만드는 차이는 운이 아니다. 차이는 공이 회전하는 횟수, 스핀에 있다. 똑같은 궤적이라 하더라도 스핀이 더 많이 걸린 공은 네트에 맞고 상대편 코트로 넘어갈 확률이 올라간다. 스핀을 더 많이 넣으려는 의지, 결국 운도 중요하지만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이 증거를 확실히 인멸하려는 의지와 간절함이 더 있었더라면, 반지에 스핀이 더 들어가서 펜스에 맞고 상대편 코트로 넘어갔더라면 크리스에게 행운이 되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3분에서 감독은 필자의 감상을 무색하게 만드는 기묘하고 노련한 솜씨로 관객들의 허를 찌른다. 

 

무조건 운이 좋아야 한다?

크리스는 조사를 받으며 경찰에게 놀라와 불륜 관계였다고 밝히고 가족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한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경찰 중 한 명은 그가 휴윗가의 별장에 있는 엽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강하게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잠을 자다가 깨서 크리스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그 경찰은 출근해서 동료에게 자신의 추리를 열변하면서(실제로 다 맞았다) 조사를 철저히 하자고 한다. 그러나 동료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어제 마약중독자 간의 싸움에서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피해자의 주머니 속에서 결혼 날짜와 이니셜이 적힌 노부인의 것이 틀림없는 결혼반지가 발견됐다고 말한다. 어떤 마약중독자가 크리스가 넘기지 못한 반지를 강둑에서 주워 자기도 모르게 크리스의 계획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펜스를 넘어가지 못한 반지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작용했고 마약중독자가 이를 줍는 행운까지 더해졌다. 

 

물론 크리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를 의심하던 경찰관은 곧바로 의심을 거두고 동료와 아침이나 먹으러 나간다. 새로 태어난 크리스의 자녀를 보며 훌륭하게 자라는 것 보다는 무조건 운이 좋아야 한다는 톰의 말에 휴윗가 사람들은 맞장구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그 밖에 주요 장면을 장식하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오페라 속 상황과 가사와는 다르게 오해, 아이러니, 통제되지 않는 선택과 인생을 가리키는듯하면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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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우리의 인생이 비참하다는 감독의 논조를 강화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실존으로서 매 순간 책임져야 할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마저 우리의 통제대로 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뜻대로 된 듯해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지가 크리스의 의도대로 넘어갔다면 그는 체포됐을 것이다. 그는 반지가 넘어간 줄 알지만 사실은 아니었고 그에 따른 과정과 결과는 크리스와 우리 모두의 예상과 반대된다. 크리스는 완전 범죄가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줄 알고, 클로이와 휴잇가는 크리스가 능력 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으로 알고 있고, 경찰들은 놀라가 그저 안 좋은 장소와 시간에 있었던 것으로만 안다. 안 그래도 비참한 삶인데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마저 개인의 순수 자유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더한 사실은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개인의 노력도 카르마도 아니라는 거다. 그냥 운일 뿐이다. 이유는 찾을 수 없고 그냥 재수가 있어서, 재수가 없어서다. 시지프는 신들을 속인 벌로 무거운 돌을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굴려야 한다. 카뮈를 좋아하는 우디 앨런의 생각에 우리들은 마치 이 시지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우디 앨런의 시지프는 한술 더 떠 운(명) 앞에 무력하고 무지하기까지 하다. 무방비하게 운의 영향을 받으면서 무력하게 묵묵히 돌을 굴려야 한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지프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속이는 방법밖엔 없다.


 우디 앨런은 이런 암울한 인생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 본 작품 안에서는 없는 듯하다. 아니라면 그가 영화 속에서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대사 &#8211;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다-를 인용했을 리 없으니.   

 

비참함을 덜어줄 무언인가가 필요하다

그가 해답을 제시했다면 잘 모르겠지만 감독의 개인사와 작품들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건 식상하고 고전적이지만 역시 사랑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작품처럼 로맨틱하지만은 않은 감독의 사생활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비관적인 그의 인생관을 접했을 때 생각나는 우화가 있었다. 불교의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안수정등도>의 인생에 대한 비유다. 어떤 사람이 들판을 걷고 있는데 성난 코끼리가 갑자기 그를 쫓아와 피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다 보니 칡넝쿨이 달린 우물이 있어 우물 속에 매달려 몸을 숨겼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고 우물 밖에는 코끼리가 성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그가 매달린 칡넝쿨을 갉아 먹고 우물 벽에는 작은 뱀들이 나타나 그를 노린다. 그 때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 사람은 자신의 위급한 상황도 잊은 채 꿀을 받아먹으며 꿀이 더 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는 우화다.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흘러가는 세월, 칡넝쿨은 생명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낮, 작은 뱀은 질병, 바닥의 독사는 죽음, 벌은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를 뜻한다. 

 

비참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거기다가 누군가의 칡넝쿨은 강철케이블처럼 튼튼할 수 있고 누군가의 칡넝쿨은 나팔꽃 줄기만 못할 수도 있다. 누구는 작은 뱀들이 없을 수 있고 누구는 우물 밖에서 돌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걸 결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언급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불설비유경>에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보잘 것 없는 쾌락을 탐하냐며 중생들을 깨우치려 하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정말로 비참한 인생이 아닐까. 무력하게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라 해도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 깨어 있는 의식이든, 반항이든,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이든, 사랑이든, 오욕을 충족시키는 쾌락이든- 비참함을 덜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관람일: 200807광화문 씨네큐브, 220120네이버 시리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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