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간행된 『漢方醫藥界』는 한국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로서 의의가 있다. 불행하게도 1913년의 창간호는 현재 남아있지 않고 1914년 간행된 제2호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남아 있는 이 자료 속에는 朝鮮醫生會 會長인 洪鍾哲, 副會長인 徐丙琳, 評議長인 張容駿, 朝鮮醫生會 幹事인 裴碩鍾, 私立醫學講習所長인 李峻奎 등의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여러 글들을 통해 쇠퇴해 가는 한의학을 되살리고자 학문적 우수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설하고 있다. 이들의 값진 노력의 결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한의학은 다시 부활해 현재까지 온 국민 곁에 있게 되었다.
이 잡지가 담고 있는 정신뿐 아니라 자료적인 측면에서 값진 것은 당시 朝鮮醫生會에서 활동했던 인물에 대한 면면을 소개하는 난이 앞부분에 있어서 근현대 한의학 인물을 연구하는 필자와 같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소개가 되어 인물로는 朝鮮醫生會의 會長 洪鍾哲, 副會長 徐丙琳, 總務 黃翰周, 幹事長 李鶴浩, 評議長 張容駿, 私立醫學講習所學監 洪在皥, 朝鮮醫生會 幹事 沈希澤, 私立醫學講習所講師 裵碩鍾, 朝鮮醫生會 幹事 趙性燦, 私立醫學講習所 講師 李世浩, 朝鮮醫生會 評議員 孫師濬, 私立醫學講習所 講師 朴海鎭, 漢方醫藥界編述員 李洵宰 등이 있다.
이 잡지에 채워져 있는 글들은 시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많다. 徐丙琳은 “醫門參古懲今”이라는 글에서 경쟁적 세계사회에서 한의학이 살아남기 위해서 日新又日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뒤로 張容駿의 “運氣綱領”, 李峻奎의 “傷寒論”, 裵碩鍾의 “傷寒汗下虛實辨論”, 洪鍾哲의 “婦人論”, 黃翰周의 “鍼灸總論”, 崔奎憲의 “小兒生長調護論”, 李鶴浩의 “內傷論”, 姜元熙의 “人有四象說” 등의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어서 게재하고 있는 金聲根의 ‘陽平君小傳’, ‘鄭北窓先生傳’, ‘芝田先生小傳’은 한국을 대표하는 醫家로서 陽平君 許浚, 北窓 鄭 , 芝田 李臣奎 등의 전기를 위인전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 한의학 학술잡지에 최초로 등장하는 위인전 형식의 글이 아닌가 한다.
지면 관계상 ‘陽平君小傳’의 내용을 번역하여 아래에 기록하고, ‘鄭北窓先生傳’, ‘芝田先生小傳’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양평군 허준은 양천사람이다. 선조시기에 儒醫였다. 임진난 때 의주로 임금을 호종하여 크게 수고하여 崇政의 품계를 받아 扈聖의 훈록을 받았다. 나중에 의서편찬의 명을 받아서 허준이 여러 해 동안 깊이 생각하여 위로 헌원과 기백에서부터 근세의 경험방에 이르기까지 강과 령을 설정하여 내용별로 나누어서 여항간의 우매한 지아비라도 분명하게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이 밝게 하니, 이름하여 동의보감이라고 하여 세상에 간행해내니, 무릇 25권이다. 外史에서 옛 사람이 재상이 되지 못하면 마땅히 良醫가 되라 하였으니, 博施濟衆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의술만 있고 그 책이 없다면 후세에 전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또 중국 사람들이 조선에 三大 의서가 있으니 許浚의 東醫寶鑑이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鄭北窓先生傳’은 北窓 鄭 의 전기를 쓴 것으로서 각종 신기한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생애와 奇蹟을 적은 것이며, ‘芝田先生小傳’은 순조시기 순원왕후를 치료하여 이름을 떨쳤던 李臣奎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