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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5일 (목)

“한국 韓醫學의 역사 인식을 다시 세우자”

“한국 韓醫學의 역사 인식을 다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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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철 교수 / 원광대 한의과대학



객관성·진실성 결여된 채 한국 고대 의학 기술



한의학 위상과 발전 위한 추가적 연구·조사



또한 근대 일본사회에 발간된 일부 사료를 포함하여 현대에 각종 문헌에서 知聰의 역할은 中國과 日本을 중심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두종 선생의 주장에 근거하여 ‘日本書紀’와 ‘新撰姓氏錄’의 내용이 섞여 일본의 고구려 정벌설을 배경에 둔 知聰의 고구려 경유설과 고구려에 대한 의약서 도입 내용이 국내·외적으로 공신력을 얻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나아가 한반도의 한국 의학의 학술적 기원이 지총에 근거한 561년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중국 의학에 대한 한의학의 종속성을 부각하는데 활용되게 되었다.



‘日本書紀’의 醫藥交流와 관련하여 百濟, 新羅 및 高句麗를 통해 한민족의 고유한 醫藥技術을 日本이 수용적 차원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414년에 신라 의사 金波鎭漢紀武이 찾아와 치료했다는 기록, 458년에 百濟로부터 뛰어난 醫師를 불러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나아가 知聰의 존재가 추정되는 553년에는 百濟로부터 醫博士, 曆博士, 易博士 등을 통한 교류를 하였다는 기록이 ‘日本書紀’에 등장한다.



이는 간접적으로 이미 한반도에는 국가간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만한 고유한 의약기술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이와 관련한 ‘백제신집방’과 같은 의약서, 약물 및 처방이 삼국시대에 존재함이 밝혀지고 있기도 한다.



더욱이 중국에서 발간된 ‘中國醫學通史(古代卷)’ “三國 兩晉南北朝 中日醫學交流” 부분의 내용에 보면, “초기 일본의 중의학 접촉은 주로 古代 朝鮮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라고 기술하면서 일본의학에 대한 영향은 대개가 한국을 통한 간접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古朝鮮 이후로 이미 한국과 중국의 의학교류가 빈번하였다고 명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三國志’ 東夷에 대한 내용 중 “有病知以艾灸或燒石自위, 地臥上或隨痛處以刀決脈出血”이라고 하여 艾灸와 평術이 유행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두종 선생의 주장을 포함한 근·현대의 한국과 일본에서 나온 자료를 근거로 중국 의학의 세계화의 시작과 함께 한국 의학에 대한 영향은 561년이라고 병행하여 기술한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692년 신라는 중국식 醫事制度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점은 고대 한국에 기존에 존재했던 자생적 의학이 중국식 모델로 변화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동북아시아 지역 패권 다툼에서 성공한 중국(당시 唐나라)에 의하여 여러 문화와 기술이 타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중국식 모델이 만들어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日本 고대사회에서 겪게 됨을 알 수 있는데, 推古天皇 이전에는 고대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와 기술을 전수받아 그것을 모델로 삼았지만, 600년 이후부터는 당나라를 모델로 하는 문화와 기술을 단계적으로 도입하여 “大寶令”(697년)이란 醫事制度를 수립하게 된다.



결국 고대 한국사회에서는 中國과는 별개의 자생 의학기술이 존재하였고, 日本과의 교류를 통해 전파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知聰이 中國式 의학과 기술을 高句麗에 전달했다는 내용 속에서 고대 한국사회의 의학의 변천 모습과는 일치하지 못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561년 高句麗가 中國으로부터 다양한 의학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할 경우 692년 新羅에서 벌어졌던 의학시스템의 변화가 당시에 高句麗에서 먼저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의 130여년 지난 시점에서 고대 한국 의학이 中國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知聰의 존재와 역할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조사연구를 통해 知聰의 실존 여부와 그 역할을 탐구하여 보았다. 한국고대 의학사와 관련하여 金斗鍾이 지은 ‘韓國醫學史’를 비롯하여 근·현대에 발간된 각종 醫史學 서적은 韓國 의학의 고대, 중세 및 근대 韓醫學 歷史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은 분명하다고 사료된다. 다만 이 시기 대부분의 韓半島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韓國 醫學을 다룬 醫史學 書籍들이 日本의 韓半島 점령기를 겪었던 학자들에 의하여 완성이 되어 왔고, 부분적으로 객관성 또는 진실성이 결여된 자료를 통해 韓國 古代 醫學을 기술하고 있음을 知聰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만약 이 문제가 韓醫學의 위상과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면 현재의 우리는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고대 한국 의학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韓(國)醫學의 독창성이나 주체성에 대한 역사인식을 다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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