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속초4.0℃
  • 맑음0.0℃
  • 맑음철원-2.4℃
  • 맑음동두천-0.7℃
  • 맑음파주-2.2℃
  • 맑음대관령-2.0℃
  • 구름조금춘천0.9℃
  • 눈백령도-2.4℃
  • 맑음북강릉4.1℃
  • 맑음강릉5.5℃
  • 맑음동해5.9℃
  • 맑음서울-0.3℃
  • 맑음인천-1.2℃
  • 맑음원주0.2℃
  • 비울릉도2.8℃
  • 맑음수원-0.1℃
  • 구름조금영월1.7℃
  • 맑음충주1.5℃
  • 구름많음서산0.7℃
  • 맑음울진7.0℃
  • 구름많음청주2.2℃
  • 눈대전2.1℃
  • 맑음추풍령0.8℃
  • 맑음안동3.3℃
  • 맑음상주2.9℃
  • 맑음포항5.2℃
  • 흐림군산2.3℃
  • 맑음대구4.2℃
  • 구름많음전주2.1℃
  • 맑음울산4.7℃
  • 맑음창원5.7℃
  • 눈광주1.9℃
  • 맑음부산5.5℃
  • 맑음통영6.1℃
  • 구름많음목포4.9℃
  • 맑음여수4.2℃
  • 구름많음흑산도5.4℃
  • 구름많음완도5.3℃
  • 흐림고창1.9℃
  • 맑음순천2.9℃
  • 눈홍성(예)1.0℃
  • 구름많음0.9℃
  • 비제주7.9℃
  • 흐림고산7.5℃
  • 구름많음성산6.3℃
  • 구름많음서귀포10.0℃
  • 맑음진주5.4℃
  • 맑음강화-1.1℃
  • 맑음양평1.1℃
  • 맑음이천1.3℃
  • 맑음인제-0.1℃
  • 맑음홍천0.4℃
  • 맑음태백-1.1℃
  • 구름조금정선군0.6℃
  • 맑음제천0.5℃
  • 구름많음보은1.2℃
  • 구름많음천안1.0℃
  • 구름많음보령2.3℃
  • 구름조금부여4.1℃
  • 구름많음금산1.7℃
  • 구름많음2.4℃
  • 흐림부안2.8℃
  • 구름조금임실2.2℃
  • 흐림정읍1.2℃
  • 구름조금남원2.4℃
  • 구름조금장수0.2℃
  • 흐림고창군1.2℃
  • 흐림영광군3.9℃
  • 맑음김해시6.2℃
  • 구름많음순창군2.3℃
  • 맑음북창원5.2℃
  • 맑음양산시6.8℃
  • 구름조금보성군5.6℃
  • 구름많음강진군3.3℃
  • 구름많음장흥3.8℃
  • 구름많음해남5.4℃
  • 맑음고흥6.2℃
  • 맑음의령군3.7℃
  • 맑음함양군3.5℃
  • 맑음광양시5.5℃
  • 구름많음진도군5.2℃
  • 맑음봉화1.5℃
  • 맑음영주1.5℃
  • 맑음문경1.9℃
  • 맑음청송군2.4℃
  • 맑음영덕4.2℃
  • 맑음의성3.8℃
  • 맑음구미3.4℃
  • 맑음영천4.5℃
  • 맑음경주시4.1℃
  • 맑음거창2.5℃
  • 맑음합천5.3℃
  • 맑음밀양4.8℃
  • 맑음산청3.3℃
  • 맑음거제6.2℃
  • 맑음남해6.1℃
  • 맑음5.7℃
기상청 제공

2025년 12월 25일 (목)

김남일의 儒醫列傳 86

김남일의 儒醫列傳 86

B0112007120744030-1.jpg

醫方卜筮에 능통한 조선초 개국공신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되었던 권중화는 醫方과 卜筮에 뛰어난 인물로 정평이 나있었던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고려 공민왕 2년인 1353년 문과에 급제하여 右左副代言을 지내고, 知申事로서 인사행정을 담당하였다.



우왕 3년인 1377년에는 정당문학으로 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다. 조선 개국 후에도 모나지 않는 처세로 태조의 눈에 들어 1396년에는 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8년에는 醴泉伯에 봉해졌고,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領議政府事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다.



권중화는 특히 의약에 정통하여 고려말부터 전해져온 ‘三和子鄕藥方’을 ‘鄕藥簡易方’으로 다시 편집했다. ‘鄕藥簡易方’은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던 鄕藥醫學의 진수로서 쉽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처방들을 모아 놓은 처방집 성격의 의서이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1433년에 간행된 ‘鄕藥集成方’에 남아 있는 17개 정도의 조문을 통해 그 면모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종 1년인 1399년에는 韓尙敬과 함께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한다. 말과 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이 醫書가 이 시기에 편집된 것은 새로 개국한 국가의 경제와 관련된 소와 말의 수급을 원활히 하고 생존율을 높여서 국가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권중화는 신국가를 만들기 위해 醫藥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알았던 조선 초기의 儒醫였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