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6개월 남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던 암 환자의 5명 중 1명은 듣게 될 말이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표준 암치료의 보조적 관리에 종사하고 있던 많은 의료인들도, 환자분들로부터 꽤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보호자로서 들어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말기’라는 단어의 임상적 정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왜?”
대한의학회에서 발표한 말기의 이론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적극적인 암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으로 인하여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 또는 ‘암의 진행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의 수행 능력이 심각히 저하되고 신체 장기의 기능이 악화되어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 정의에서 언급된 수개월이 일반적으로 6개월 정도의 기간임을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짧기도 하고 하염없이 길기도 하다.
연구에 따르면 말기로 소견을 들은 암 환자의 80%가 ‘육체적으로 힘든 활동은 제한되나 거동(보행)과 가벼운 일 또는 앉아서 하는 일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가벼운 집안일, 사무’(ECOG 일상생활수행능력 평가 지표 1점)의 상태라고 한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환자들이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왜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말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게 백번 천 번 이해된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 침상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고 계신 환자분들의 보호자는 “저 상태로 6개월을 버티라는 거냐”라고 가슴을 치며 말하는 것도 감히 이해한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정일 것이다.
말기로 진단 받은 암 환자는 몇 가지의 절차를 거쳐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의료기관(이하 호스피스)을 이용하게 된다.
해당 기관 관련 종사자의 말을 빌리자면, 호스피스는 죽음의 질로 이어지는 삶의 질을 관리 받는 곳이며 존엄한 임종을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가족 간의 관계를 포함한), 영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통증과 섬망 증상을 조절하면서 임종 준비를 절차적으로 하는 곳이며,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환자들은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 비약적으로 말하는 곳이기도 하다.

환자분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하지만 적극적인 치료(cure)에서 내몰린 채 6개월을 준비해야 하는 또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 몸의 고통만이라도 관리(care)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의료기관이라는 점에서 너무 고맙다고 표현하시는 분들도 꽤 자주 있다.
어쩌면 환자분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치료가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돌봄’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유지하는 기술은 한계가 있을지라도, 삶을 지탱하는 태도는 끝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의료진이 마지막까지 동행하는 것.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고마움과 동시에 호스피스에서의 희망이라고 느끼는 걸까?
이미 수 년 전부터 호스피스에 들어가려면 최소 2개월은 대기해야 한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들렸으며, 실질적 수요는 최근 들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내가 여기에 적은 이유는, 호스피스를 개원할 수 있는 의료인에 한의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와는 다르게 우리는 현실적으로 단독 개원을 할 수는 없다. 잠깐이라도 ‘말기 암 환자의 통증에 침을 놔주면 되지 않을까?’, ‘말기 암 환자의 섬망에 시호가용골모려탕을 쓰면 되지 않을까?’라 생각한 독자는 없길 바란다.
마약성 진통제를 몇 백 mg씩 써도, 신경안정제를 몇 날 며칠을 써도 조절되지 않는 게 말기의 증상이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한의사도,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 곁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법적으로 이미 설 수 있다는데, 준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 우리에겐 처방권이 없는 각종 약물들을 달달 외워야 되고, 때로는 타 직종에게 협업인지 읍소인지 모를 모양새로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럼에도, 우리의 역량과 아량을 키워야 한다.
앞으로의 또 다른 변화를 기대
기술보다 태도, 치료보다 돌봄이 그 중요한 순간에, “잘 죽기 위해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외치는 단 1명의 사람이 있는 이상,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한의사가 1명이라도 더 생겨야 한다.
삶의 끝에서 누군가의 손을 꼭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건 결코 선택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 감당해 내야 할 몫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덜 아프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건 결국 모든 의료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 동안 한의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또 다른 변화에 오늘의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오늘의 글을 통해,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