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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8일 (월)

[시선나누기-38] 꽃씨 뿌리다

[시선나누기-38] 꽃씨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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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소는 죽음이 닥치모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줄라고 은어를 쓴다. 소 잡기 사흘 전부터 천도를 위해 관음기도를 하는데 이거를 ‘관음찜질’이라 부른다. 적어라.”

그 연극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다. ‘To be or not to be’는 <햄릿>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죽느냐 사느냐’로 간단하게 번역되었지만, 존재에 대한 깊고 근원적인 물음을 지닌 대사라고들 한다. 

백정 이야기와 설화를 맛깔나게 버무린 연극 <강목발이>에는 대대로 소 잡는 일을 해온 노인의 낯선 대사가 등장한다. 대물림이 싫어 반항하는 아들과, 발골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를 모두 품어야 하는 노인의 입장이 서글픔과 비애를 몰고 오는 연극이다. 그런데도 소 잡는 일을 설명하는 저 장면에는 신명나기까지 하는 생동감이 있다.


소 몸 주위에 정화수 뿌리는 건…, 


하노인 : 산영감.

지  환 : 산영감.  

하노인 : 소가 도살장에 들어올 때 ‘산영감, 어서 오시오’ 아니면 ‘어사님, 어서 오시오’, ‘신령님, 어서 오시오’ 한다. 소가 영물이니까 높이는 기다. 

경상도 사투리와 함께 난생처음 듣는 말들이 무대에 퍼진다.

하노인 : 백정이 도살장에 들어오는 건 ‘날감투’, 도살장 문에 휘장을 내리는 건 ‘쪽바가지’.

지  환 : 날감투, 쪽바가지.

하노인 : 소 눈을 가리는 건 ‘귀신 감투’, 소 몸 주위에 정화수 뿌리는 건 ‘꽃씨 뿌린다’.

꽃씨 뿌린다... 저렇게 아름다운 말을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소를 위해 소가 못 알아듣는 말을 약속해서 쓰고, 두려움을 막기 위해서인지 소의 눈을 가리고, 그리고 정화수를 뿌린단다. 그 정화수를 꽃씨라고 부른단다. 이런 꽃씨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리고 인간이 소에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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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영감님! 그간 잘 지내셨소? 좋으시겠소. 인자 이승에 맺힌 한(恨) 다 풀고 저승만 가시모 되겄네. 내 잘 가시라고 꽃씨 뿌려드릴 테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하소. 먼 길 가니까.” 

대사를 듣자 하니 가슴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있다. 


하노인 : 소 잡을 때 쓰는 칼을 ‘신팽이’, ‘족보’, ‘무당꽃’이라고 한다.

지  환 : 신팽이요?

하노인 : 신의 지팽이.

지  환 : 아-

하노인 : 백정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칼은 ‘족보씨’라 했는데, 백정이 죽으면 쓰던 칼을 관에 넣는다. 그거를 ‘족보캐다’라고 했다. 그라고 소 잡을 때 쓰는 도끼를 ‘촛대’, 심줄을 끊을 때 쓰는 칼을 ‘김정승’이라고 했다.

지  환 : 김정승.

하노인 : 소의 발을 묶는 건 ‘기둥 다듬는다’. 소를 죽이는 건 ‘게딱지’. 죽은 소에 붉은 보를 씌우는 건 ‘해골탕’. 그라고 붉은 보를 벗기는 건 ‘널짜다’. 목을 자르는 건 ‘돌맞춘다’. 

지  환 : 뭐가 많네요.

하노인 : 그라모 대충하는 줄 알았나? 요즘에는 안 하지만 옛날에는 신성하게 했다. 망자 염하드끼...장례식하고 비슷하다.


내 그 한 푸시면 평생 잊지 않고…,


나는 노인이 말할 때마다 입술을 움직여 따라 해 본다. 칼을 물에 씻는 거는 ‘깃발 날리다’. 모든 수고가 다 끝나모 ‘꺼졌다’. 촟불처럼 생명이 꺼졌다. 영혼은 저승으로 가고 정육만 남았다.


동네 꼭대기에 사는 이유를 묻자 노인은 껄껄 웃는다. 

 “소심한 복수다. 세상 사람들한테 대대로 손가락질받고 안 살았나. 내 최고의 정육을 만들끼다. 세상 최고로 맛있는 고기를 만들어서 이 높은 곳까지 힘들게 사러 오게 만들끼다. 그래서 평생 받은 수모 갚아 줄끼다.” 


노인은 웃지만,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난 뒤에도 골은 깊어 노인은 파혼당했고, 아들은 어미 없이 자라느라 병들고, 산동네는 재개발로 스러져간다.

극의 한 축은 강목발이 이야기인데, 절름발이였으나 차별받는 세상에 의적으로 살다가 죽임당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인간의 몸에 깃들었다는 설화다. 노인의 아들은 강목발이의 영혼으로 때때로 발작한다. 


극의 마지막, 장엄한 의례가 펼쳐진다. 백정의 임무로 강목발이를 처형했던 조상을 대신해 노인은 예를 갖추어 절한다. 늙고 구부정한 몸이 두 팔을 치켜들었다가 바닥에 엎드릴 때 뼛속까지 서린 한이 우렁우렁 흘러나온다.

“우리 할배도 백정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 아입니꺼? 그래도 목 벨 때 원한 갖지 말라고 제사 지내고 안 했습니꺼. 내 그 한 푸시면 평생 잊지 않고 모시고 살겠습니더.” 


꽃씨 뿌리자아-.


그리고 한판 굿을 연다. 객석에 앉은 내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관음찜질한다- 날감투 열어라- 쪽바가지 내려라-

“강목발이님 오시오. 그간 잘 지내셨소? 좋으시겠소. 부잣집 털어 가난한 사람 도와주니 의적이라면서요? 이제 이승에 맺힌 한 다 풀고 저승만 가시믄 되것네. 내 잘~ 가시라고 귀신 감투 씌우고 꽃씨 뿌려드릴 테니 맴 준비 단단히 하소. 먼 길 가니까.”

하노인 : (정화수를 뿌리며) 꽃씨 뿌리자아-.

(도깨비들, 붉은 꽃잎을 날린다.)

하노인 : (크게) 신팽이 들어라. 기둥 다듬자아-.

하노인 : (크게) 널짜자아-

(도깨비들, 저승길을 만든다.)

하노인 : 깃발 날리자! 

도깨비들 : 깃발 날리자! 

하노인 : 꺼졌다-.

(붉은 꽃잎이 계속 날리며,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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