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윤 원광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3월이 되면 대학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 학기를 맞은 강의실에는 낯선 긴장과 기대가 함께 흐르고, 학생들은 새로운 시간표와 함께 또 한 해의 학습을 시작한다. 동시에 캠퍼스 밖에서는 또 다른 시작이 이뤄진다. 얼마 전 졸업한 학생들이 이제는 한의사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서 있는 이 두 장면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한의사 국가시험이 끝난 직후의 공기는 다소 가벼워지는 듯하다. 오랜 시간 이어졌던 긴장이 풀리고, 학생들은 비로소 “끝났다”는 말을 꺼낸다. 강의실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은 한결 편안해지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누군가는 잠을 보충하며, 또 누군가는 앞으로의 진로를 조심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종료’와 ‘시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 시기를 한의사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때부터 진짜 공부가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한의과대학에서의 시간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흐르는 것 같다. 교육과정의 흐름은 결국 국가시험과 면허 취득이라는 지점으로 수렴된다. 수업은 시험과 연결되고, 학습의 우선순위는 시험과의 관련성에 따라 정해진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기준에 익숙해진다.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하기보다, 무엇이 출제되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방식은 어느 순간 당연한 학습 태도가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면허 취득은 하나의 완결처럼 느껴진다. 오랜 시간 축적된 노력의 결과이며, 동시에 하나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에게 그 순간은 ‘마침표’처럼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료 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감각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환자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이 시작된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양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증상, 하나의 진단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능력이다. 여기서 많은 한의사들이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그때부터 진짜 공부가 시작됐다.”
아마도 면허 이후의 학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임상에서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상황 속에서 적절한 판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질문의 방식도 달라진다. “이 문제의 답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환자에게 무엇이 적절한가”를 묻게 된다.
이 지점에서 교육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본다. 만약 면허 이후에 이러한 학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대학 교육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지식의 전달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실제 임상에서 요구되는 판단력과 적용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임상의 첫 경험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지금의 한의학교육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면허 취득 이전’에 최적화되어 있다. 교육과정은 점점 더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평가는 세분화되며, 학생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을 소화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학습을 빠르게 소비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깊이 있게 사고하고 통합하는 경험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상에서 요구되는 역량은 다르다. 환자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며, 자신의 결정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수정하는 능력은 단순한 암기와 반복으로 형성되기 어렵다. 이러한 역량은 실제와 유사한 상황에서의 경험, 충분한 성찰의 시간, 그리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길러진다.
실제 진료 현장에서 초보 한의사가 마주하는 어려움은 단순히 ‘모르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연결하고 적용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환자를 마주했을 때 어떤 정보를 우선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치료 방향을 설정할 때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교과서적 지식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답을 찾는 능력보다, 가능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문제는 이러한 경험이 학생 시절에는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수업에서는 정리된 형태의 지식이 제시되고, 평가는 정답 여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 결과 학생들은 ‘틀리지 않는 것’에는 익숙해지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익숙해지지 못한다. 임상에서의 첫 경험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는 사람으로 남았는가?
그렇다면 교육은 달라질 필요가 있다. 면허 취득 이후 임상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도록, 교육의 중심을 단순한 지식 전달에서 적용과 판단 중심의 학습 경험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사례 기반 학습, 임상 추론 교육, 통합적 평가 방식 등은 이러한 변화를 위한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다. 한의학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추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경험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만들 것인가이다.
결국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는 사람으로 남았는가’가 의료인 양성의 목적이 될 것이다. 면허 취득 이후에도 계속 배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결코 가진 지식의 양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배움을 대하는 태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를 확장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개 학생 시절의 학습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한의과대학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면허를 준비하는 기간이 아니다.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질 학습의 방식을 형성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그 ‘이후’를 준비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3월의 캠퍼스, 끝났다고 느껴지는 지점과 실제로 시작되는 지점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