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 현재 직면한 의료개혁의 과제는 국내 의료제도의 역사적 과정에서 오랜 기간 존속된 구조적 제약과 연관된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보건사회연구’ 제45권 제1호에서 허순임 교수(서울시립대학교 행정학과)는 ‘의료개혁의 지체와 시민적 삶의 위기’라는 보고를 통해 정부와 의료계가 대치하면서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이 이어졌고, 아직까지 합의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분석했다.
이 보고에 따르면, 현대적인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체계적인 의대 교육을 통한 인력양성, 병원 중심의 진료, 의료보장제도라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해방 후 미국의 영향 아래 형성된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특징은 전문가로서의 높은 자율성과 강한 집단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의료계의 특성상 그들의 인식과 문화가 계승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다른 영역보다 경로의존적 성격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른 국내 의료제도의 기반은 공적부문의 제한적 역할, 전문의 중심의 인력양성체계,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 확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첫째, 해방 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의사들이 연수교육 등을 통해 수용하게 된 미국의 의료체계는 정부의 역할을 위생과 방역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진료 부문은 민간 영역 중심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민간 의료 공급체계로의 지향성에 영향을 끼쳤다.
둘째, 미국식 인력양성체계를 받아들이면서 국내 의료체계는 초기부터 전문의 중심으로 형성됐다.
전문의 중심의 인력양성 시스템이 자리 잡은 이후인 1977년 공적 의료보험이 도입되면서 의료계가 원했던 행위보상방식(fee-for-service, FFS)은 의료계의 자율성을 발휘하는 데 유리한 반면, 의료수가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료계가 지속적으로 갈등을 촉발하는 지불제도로 정착됐다.
셋째, 1960년대부터 의과대학과 의료기관 증설이 이뤄지면서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가 빠르게 성장했으며, 1977년 공적 의료보험이 도입됐고, 1989년에는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됐다.
이 같은 과정은 의료공급 및 공적 의료보험의 확대와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의 확대가 중첩되면서 의료시장의 확대를 불러왔고, 이는 성장 지향적이고 수익 추구적인 의료제도를 구축했다.
또한 2005년부터 전개된 보장성강화 정책과 2008년 이후 급증한 실손의료보험이 수요를 확장시킨 결과, 2000년 이후 국민의료비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이 상승했고, 2022년 GDP 대비 국민의료비는 9.7%로 OECD 평균(9.2%)을 상회했다.
의료시장이 확대되면서 의료공급도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나 지역 간, 진료과목 간 의료 자원의 불균형은 점점 더 심각해졌으며, 특정 진료과목의 쏠림 현상으로 인한 응급, 외과, 소아과 등 진료 과목의 공백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런 부작용은 효과적이지 않은 의료수가 관리와 의료계의 높은 자율성이 결부돼 있는 등 복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에 현재 우리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의료자원 공급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의료공급의 지속적인 증가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 간 의료자원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는데, 이런 불일치에 기여하는 제도적 요인은 지역단위 의료공급의 규제의 부재에 따른다.
그동안 각종 규제 완화 조치로 의료공급의 수도권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데 이어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기관의 대형화는 의료인력 배분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라 지난 30년간 유지돼 온 자유방임에 가까운 공급 확대와 규제 완화의 방향성을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둘째, 의료인력 배출에 비해 늘어나는 병상 수가 훨씬 많아 심한 불균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반면 병상 수는 OECD 평균의 3배에 달하고 있다.
이 같은 과도한 병상 수의 증가는 비용을 증가시키므로 원가를 보상받기 위한 의료수가의 인상 요구대로 이어졌고, 이와 더불어 고가의 검사 장비 유치와 수익 추구적 의료기관의 관행이 결합되면서 인력 확충보다는 시설 및 장비에 의존한 진료에 치중함으로써 의료서비스의 비용 증가를 초래했고, 특정 진료과목쏠림을 가져왔다.
셋째, 현행 건강보험 제도는 민간 우위의 공급체계하에서 서비스 공급을 사실상 민간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시행됨으로써 의료서비스 가격관리에 미흡했다. 이는 의료계가 높은 협상력을 갖게 됐고, 비급여 서비스에 대한 상당한 자율성까지 갖게 됐다.
즉, 급여 항목별로 수가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의료계는 보험수가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협상력을 발휘하는 한편, 실질적인 규제가 없는 비급여서비스에 대해서도 가격과 공급량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이 같이 급여 영역에 대한 협상력의 확보와 비급여에 대한 자율성의 혼재는 수익 추구 지향성을 높여 왔다. 이는 수익에 유리한 진료과목 선호와 결부돼 의료비 지출과 진료과목 간 인력배분의 합리성을 저해하고 있다.
이에 비급여와 미용 시술 등으로 수익을 확장하는 진료과목들의 수익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필수의료과목과의 격차는 줄일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인력 배분 문제는 지속되거나 더 악화될 것으로 진단했다.
보고서에서는 특히 의료제도의 역사적 맥락에서 확인되는 구조적 제약과 더불어 의료계가 정부와의 갈등 국면에서 이익을 관철했거나, 개혁의 저지를 성취한 경험은 의료개혁을 지체시키는 요인으로 꼽았다.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료계의 대정부 투쟁의 강도가 크게 높아졌고, 전국 단위의 결집도 이뤄졌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부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다. 의료계는 이러한 정책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이번 의료개혁 진행과정에서 최장기간 동안 강도 높은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 허순임 교수는 “정부는 이전의 의료개혁의 실패 또는 지체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면밀하게 고려해야 하고, 개혁의 추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사회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이어 “의대 증원과 같이 사회적 지지가 높은 이슈조차 개혁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은 전략의 부재와 조정 능력의 결핍”이라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또 “의료개혁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은 정부의 정책 역량및 전략의 부족과 함께 의료계의 무책임성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면서 “의료개혁의 지체는 시민들의 삶의 위기와 직결돼 있으며, 의료 영역에서 자유 경쟁의 파괴적 성격을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