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치휴한방병원 진료원장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원장의 글을 소개한다.
3개월마다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가 있었다. 이 환자는 처음 왔을 때부터 이렇게 말했다.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서 치료는 안 받을 거고요, 검사만 주기적으로 해주세요.”
간과 허리 척추뼈에 전이가 있는 삼중음성 유방암 4기 환자였다. 삼중음성은 유방암 중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유형이다. 당시 알려진 바로는 삼중음성 4기 환자가 항암 치료를 받을 때 기대할 수 있는 평균수명이 13개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하지만 그 13개월이 그녀에게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의 의미는 없었던 모양이다. 30대 후반이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커리어우먼으로서의 경력이 빛나기 시작할 시기이니까.
기약할 수 없는 3개월 뒤의 예약
수없는 고민과 절망 끝에 내린 결정임을 알기에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니 치료받으세요.’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기약할 수 없는 3개월 뒤의 예약을 잡고 떠나는 환자의 뒷모습을 매번 볼 때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눈에 꼭 담았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도 CT 영상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몸 곳곳에 퍼져 있는 암의 경과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유방에 있는 거, 간이랑 2, 3번 허리 뼈에 있는 거 모두 지난번이랑 비교해서 20% 정도 진행되었네요. 평균적인 진행 속도랑 비교하면 느린 편이긴 한데 지금까지 한 검사 중에서는 속도가 제일 빠르게 커지고 있어요.”
결과가 어떻든 매번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이제 항암 치료 시작해 보려고요.”
같은 말을 다른 환자가 했다면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라는 대답부터 튀어 나갔겠지만, 이분이 처음부터 어떤 의지로 버텨왔는지 알기에 오히려 흠칫 걱정스러운 생각부터 들었다.
암 환자가 겪는 지극히 현실적인 딜레마
“마음이 왜 바뀌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환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쩔 수 없었다는 말투로 말했다.
“사실 암인 거 회사에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점점 체력이 떨어지니 숨길 수가 없더라고요.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사직서 내고 왔어요. 그리고 저는 어차피 혼자라 제가 번 돈 다 쓰고 가야 돼요.”
많은 암 환자가 겪는 지극히 현실적인 딜레마였다. 사지가 멀쩡하다 보니 매일 침대에 누워만 있을 수도 없지만, 남들과 어울리며 같은 일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아픈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군가 “그래도 암이 전염병으로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거에 비하면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고 우리 환자에게 말하는 걸 본 적 있다(그 말이 위로가 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길 바란다).
그래도 힘든 항암 치료 안 받고 1년 살았으면 선방한 거 아니냐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이어서 하는 환자의 얼굴은 체념한 듯 보이기도 했고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항암 치료는 한 번 만에 중단되었다. 항암 주사가 들어가자마자 나타난 쇼크 증상이 나타나 몇 주간 치료를 받은 후 CT를 다시 찍었는데, 그 짧은 시간 만에 전신으로 퍼져버린 암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예약도 없는 정말 마지막 뒷모습
갑자기 진행이 빨라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원래 암이라는 게 이렇게 가늠이 되지 않기에 더 무서운 병이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건 제 운명이 아닌가 봐요. 젊은 나이에 차장도 달았고, 돈도 많이 벌어봤고, 치료 안 받는 대신 나름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그러니 여한은 없어요. 아, 이럴 때 손잡아 줄 수 있는 짝지가 없는 건 좀 아쉬운 것 같네요. 아니, 차라리 혼자 놔두고 가는 사람이 없는 게 더 마음 편해요.”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을 덧붙이는 환자의 부탁에 퇴원 절차를 밟게끔 했다. 채비를 마치고 병동 문을 나서는 환자의 뒷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이제는 더 이상 3개월 뒤의 예약도 없는, 정말 마지막 뒷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