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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인류세의 한의학 <30>

인류세의 한의학 <30>

키리바스 통신 III

김태우01.jpg

김태우 교수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한의대 의사학교실

 

키리바스에 도착하고 보름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마라케이(Marakei) 섬의 한 집에서 부이아(키리바스 전통 가옥)에 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인터뷰이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목마르냐고. 기후위기가 야기하는 일상의 변화와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는 몸과 건강의 문제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로 묻고 답하는 인터뷰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을 때였다. 실제로 계속 말을 하던 나는 갈증을 느꼈고, 목을 적셔줄 수분이 필요했다. 내 목소리가 건조해지는 것을 그 인터뷰이가 알아챘던 것 같다. 목이 좀 마르다는 대답에 그는 갑자기 부이야를 내려가더니 (부이야는 높은 평상같이 되어 있어서 그 전통가옥에서 나가는 일은 내려가는 것을 수반한다) 바로 옆에 있는 야자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적당히 익은 열매를 따고 내려와서 익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기고 구멍을 뚫어, 내게 건넸다. 100퍼센트 자연산 코코넛 쥬스는 필자의 목을 적셔주었고, 모이모또를1) 마시고 진행한 인터뷰는 더 활기가 있었고 대화가 잘 풀렸다. 

 

구멍 뚫린 모이모또를 빨대도 없이 들고 마시며, 한국에서 음료수를 마시던 때와의 차이를 생각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플라스틱 병에 든 음료수를 사서 마실 때와 키리바스에서 모이모또 쥬스를 마시는 것은 차이가 적지 않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겨 있는 음류수는 인공물의 영역에 있다면, 키리바스의 모이모또는 인공물과 자연물의 경계가 모호한 물건이다. 키리바스에서의 연구 기간은 자연과 인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자연과 인공

 

본격적으로 현장연구를 했었던 마라케이 섬에서,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주로 부이아에서 진행이 되었다. 부이아는 목재로만 되어 있다. 이 건축양식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금속이 채굴되지 않는 산호섬에서, 못을 건축에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금속이 없는 부이아는 팬더너스(pandanus) 나무, 야자수에서 대부분의 자재를 얻는다. 못을 사용하지 않는 키리바스 건축양식에는, 한국의 한옥과 같이 나무를 맞추어서 집을 짓는 방식이 발달해 있다. 이가 맞게 나무에 요철을 만들어 맞대어서 나무들을 연결한다. 그리고 못의 역할을 하는 것은 코코넛 열매 껍질로 만든 끈이다. 코코넛의 겉껍질 내부는 겹겹의 섬유질로 싸여져 있는데, 이 실 같은 껍질을 가지고 끈을 만든다. 새끼를 꼬듯이 코코넛 껍질의 실들을 말아서 끈을 만들어 놓으면 매우 튼튼한 건축 자재가 된다. 요철로 맞대어 붙인 나무를 이 끈들로 묶어서 고정을 시킨다. 강한 바닷바람에도 집을 버틸 수 있게 한다. 

 

지붕은 팬더너스 나무의 잎으로 되어 있다. 야자수와 팬더너스 나무는 키리바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당신이 마라케이에 있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360도로 시선을 돌려보면 거기에 야자수 한 그루 정도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팬더너스가 보이지 않는다면, 몇 발짝 이동 후 다시 둘러보면 거기서 팬더너스 나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터뷰를 마치고 부이야에서 내려와서 이 건축양식의 재료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려면, 단지 고개만 주위로 돌려보면 된다. 그 주변에 다 있다. ‘이 녹색 잎들이 말라서 짚색의 부이아 지붕이 되는구나.’ ‘아, 이 나무가 부이아의 기둥이 되는구나.’ 금방 깨닫게 된다. 지붕, 기둥, 끈 등 인공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도 살펴보면 바로 옆 자연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라케이에서는 인공물과 자연물의 거리가 멀지 않다.

 

마라케이에서는 음료수도, 집도, 집 주변도 특별한 것이 없다. 색깔도 특별난 것이 없다. 나무색, 짚색, 흙색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붉은색 꽃이 보이기도 한다. 나무의 잎들이 보이는 녹색, 그리고 그것이 시들거나, 열매가 익었을 때의 갈색 등이 색깔의 종류였다. 그런데 이제는 원색에 가까운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리바스에도 이전과는 달리 색깔이 변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위성사진이 있다면 이러한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드론으로 몇 년 전 찍은 사진이 있다면 지금과 또 차이가 날 것이다. 플라스틱과 비닐이 들어오면서 키리바스에 없던 색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보이는 것은 대부분 플라스틱과 비닐이 버려져 있는 길거리, 해변가, 집주변이다.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이 들어보지도 못했을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이지만, 키리바스에도 한국음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한국 라면이 인기가 높다. 진라면은 키리바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양식 중 하나다.2) 한국산 라면이 인기가 좋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터뷰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는 진라면 봉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되어 있는,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색깔의 라면봉지를 키리바스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태우_2449사진.jpg

 

인공의 정도

 

특히 키리바스의 수도가 있는 타라와(Tarawa) 섬에서 이러한 색깔의 변화가 가시적이다. 타라와는 빠르게 변하는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타라와는 크게 남타라와와 북타라와로 나뉘는데, 키리바스 인구의 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남타라와는 특히 변화가 심하다.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은 색깔이었다. 여전히 부이아와 같은 전통 가옥 양식이 주를 이루는 북타라와에서 남타라와로 이동하면 그 색깔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남타라와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키리바스의 색깔이 변하는 것은 쓰레기 처리 인프라가 부족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쓰레기를 분류하고 재활용하고 매립하는 시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는 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한다. 수입량이 늘어나는 (한국산 라면을 포함해서) 공산품은 다량으로 키리바스로 들어오는데, 그 물건들을 포장하고 담고 있던 비닐이나 플라스틱은 키리바스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쓰레기들이 길거리에, 해변에, 그리고 바다 안에 쌓이고 있다.

 

키리바스의 삶에서 인공과 자연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자연물을 조금 손봐서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인공물은 자연 상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플라스틱은 다르다. 플라스틱은 말 그대로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 있다. 인간의 편의에 따라 모양을 만들 수 있고, 대량생산할 수 있다. 비닐도 마찬가지다. 인공물에는 인공의 정도가 있다. 부이아의 지붕으로 사용하는 팬더너스 나무의 잎은 조금 인공물이다. 섬나라의 색깔을 변하게 하는 플라스틱, 비닐 같은 인공물은 많이 인공물이다. 인공의 정도가 높으면, 그 인공물들은 자연으로 쉬 돌아가지 못한다. 인공의 정도가 높으면 부작용이 심하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미세플라스틱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플라스틱, 비닐 쓰레기의 문제는 전 세계가 앓고 있는 문제이지만, 각 지역과 사회의 조건에 따라 그 문제가 발현되고 심화되는 방식은 다르다. 키리바스에서 심각한 문제는 지질·지리적인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키리바스는 산호초로 되어 있고, 대부분 환상(環狀)의 모양을 이룬다. 안쪽 바다인 라군(lagoon) 쪽의 쓰레기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필자가 현장연구 하던 환상의 마라케이에는 안쪽 바다와 바깥 쪽 바다를 잇는 통로가 단 두 개 있었다. 갇혀 있는 라군의 쓰레기는 쌓이고 조각나서, 라군의 물고기들 몸으로 들어갈 것이다. 키리바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인 자라돔(reef fish)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쌓일 것이다. 키리바스가 변하면서 색깔이 변화하는 것은 단지 색깔의 변화가 아니다. (키리바스 통신 IV에서 계속)

 

1) 야자수는 키리바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음식, 약, 건축자재, 음료수 등으로 키리바스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다. 야자열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모이모또는 적당히 자란 젊은 코코넛 열매를 이를 때 사용하는 용어다. 모이모또가 코코넛 쥬스를 열매 안에 다량 가지고 있어서, 음료수를 얻고자할 때는 모이모또를 주로 따서 마신다.

2) 키리바스에서는, 하지만 요즘 자주 사용하는 K-푸드라는 말을 사용하기 힘들다. 공산품으로 포장된 인스턴트 음식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고, 야채를 보관할 냉장고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빔밥 같은 K-푸드는 키리바스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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