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속초2.6℃
  • 박무-5.4℃
  • 맑음철원-6.1℃
  • 맑음동두천-4.0℃
  • 맑음파주-4.3℃
  • 맑음대관령-0.6℃
  • 흐림춘천-3.3℃
  • 흐림백령도7.1℃
  • 구름조금북강릉1.7℃
  • 맑음강릉2.2℃
  • 구름많음동해3.0℃
  • 맑음서울-0.6℃
  • 맑음인천0.3℃
  • 맑음원주-4.0℃
  • 구름조금울릉도10.9℃
  • 맑음수원-2.4℃
  • 맑음영월-6.2℃
  • 맑음충주-3.3℃
  • 흐림서산-1.6℃
  • 구름많음울진7.6℃
  • 구름많음청주0.5℃
  • 구름많음대전-1.1℃
  • 구름조금추풍령-5.0℃
  • 안개안동-4.6℃
  • 맑음상주-4.5℃
  • 맑음포항3.4℃
  • 흐림군산1.1℃
  • 맑음대구-2.2℃
  • 구름많음전주3.5℃
  • 맑음울산3.7℃
  • 구름많음창원4.0℃
  • 구름많음광주3.7℃
  • 구름조금부산9.9℃
  • 흐림통영4.8℃
  • 흐림목포5.5℃
  • 흐림여수6.5℃
  • 흐림흑산도10.5℃
  • 구름많음완도4.6℃
  • 흐림고창4.4℃
  • 흐림순천-1.8℃
  • 박무홍성(예)-1.8℃
  • 흐림-2.4℃
  • 구름조금제주7.9℃
  • 흐림고산14.8℃
  • 구름많음성산12.7℃
  • 구름많음서귀포14.0℃
  • 흐림진주-0.5℃
  • 맑음강화-2.8℃
  • 맑음양평-3.6℃
  • 흐림이천-5.0℃
  • 맑음인제-3.7℃
  • 맑음홍천-4.0℃
  • 구름조금태백-2.8℃
  • 맑음정선군-6.4℃
  • 흐림제천-6.0℃
  • 구름조금보은-4.2℃
  • 흐림천안-2.5℃
  • 흐림보령3.3℃
  • 흐림부여-1.0℃
  • 맑음금산-4.2℃
  • 흐림-1.1℃
  • 흐림부안2.6℃
  • 흐림임실-2.7℃
  • 흐림정읍1.3℃
  • 흐림남원-1.0℃
  • 흐림장수-4.2℃
  • 흐림고창군5.5℃
  • 흐림영광군4.3℃
  • 맑음김해시2.4℃
  • 흐림순창군-2.2℃
  • 흐림북창원2.6℃
  • 맑음양산시1.0℃
  • 흐림보성군2.0℃
  • 흐림강진군2.1℃
  • 흐림장흥1.0℃
  • 흐림해남4.7℃
  • 흐림고흥2.4℃
  • 흐림의령군-3.5℃
  • 맑음함양군-5.4℃
  • 흐림광양시4.9℃
  • 흐림진도군6.9℃
  • 맑음봉화-7.5℃
  • 맑음영주-5.1℃
  • 맑음문경-4.3℃
  • 구름조금청송군-7.6℃
  • 구름조금영덕2.4℃
  • 맑음의성-6.3℃
  • 맑음구미-4.3℃
  • 맑음영천-4.4℃
  • 맑음경주시-1.8℃
  • 맑음거창-6.1℃
  • 맑음합천-2.9℃
  • 맑음밀양-2.2℃
  • 맑음산청-4.6℃
  • 구름많음거제3.3℃
  • 흐림남해4.1℃
  • 구름조금-0.3℃
기상청 제공

2025년 12월 19일 (금)

“선생님이 내 살린 거 알제?”

“선생님이 내 살린 거 알제?”

한의학 웰빙 & 웰다잉 10

김은혜 (1).jpg


김은혜 경희대학교 산단 연구원

(전 강동경희대한방병원 임상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경희대 산단 연구원의 글을 소개한다.


7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병동 문을 열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입원하러 왔는데예!” 조용한 병원에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남자는 어느새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은 채 호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요, 지가 시골에서 서울 올 때 보자기 하나 달랑 들고 와가꼬 이제 좀 자리 잡았는데예. 주구장창 일만 억수로 했드만 폐암에 걸리삐고. 마 근데 이제 암은 모르겠고 남은 건 내 새끼뿐이라예.”

흔한 자식 자랑 중에 들리는 반가운 경상도 사투리에 허허 웃으며 의무기록지를 펼치자 몇 번을 봐도 참 익숙해지지 않는 문구가 보였다.


‘보호자 없음. 더 이상 시도 가능한 항암 치료 선택지 없음. 본인에게 설명함.’


첫 문장과 여전히 ‘내 새끼’ 자랑을 하는 환자의 말이 충돌되자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자제분이 미처 간병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내용과 귀로 들리는 활기찬 목소리의 괴리감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감정에 사로잡혀 환자를 잃을 뻔했던 과거의 몇몇 순간을 떠올리며 먹먹한 마음을 접어두고 환자의 팔을 붙잡아 바이탈을 쟀다. 


“내 집에 갔다 와야 된다!”


근데 웬걸, 산소포화도가 정상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가 나왔다. “환자분, 숨 안 차세요? 혼자 어떻게 오신 거예요?” “숨 안 차는데예. 집사람은 먼저 가서 혼자 왔심더!”


보통 증상이 없는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환자 말을 끊고서 얼른 코에 산소 줄을 연결하고 뒷말은 더 듣지 못한 채 환자를 병실로 들여보냈다.


한 달 동안 치료를 하며 산소요구량이 많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산소 줄을 떼면 산소포화도가 정상보다 낮았다. 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소를 계속 유지하셔야 될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 환자는 “산소 이거 뭐 할라고 합니꺼! 숨차지도 않는데 코만 아프구로!”라고 외치며 산소 줄을 툭 빼고는 매일같이 내 새끼 자랑하기에 바빴다. 


정작 그 ‘내 새끼’는 연락처도 없고 그때까지 병원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괜히 내가 속상한 마음에 나는 언젠가부터 그 자랑들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반복되는 자식 자랑에도 끝까지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고 산소 줄을 끼워주는 걸 반복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두 달이 더 지났고 서로 친근하게 부를 정도로 가까워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를 급하게 부르며 말을 했다. “내 집에 갔다 와야 된다!” 집 계약서를 숨겨놓았는데 요즘 먼 친척들이 비어 있는 그 집에 자꾸 들어가려고 한다며, 서류가 잘 있는지 불안해서 참다 참다 이제는 가지고 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산소를 단 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집문서 챙기겠다고 보호자가 없는 곳으로 보내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절대 안 된다고 받아쳤지만 할아버지는 “집에 안 보내 주면 내 불안해서 죽는다! 보내주도 죽고 안 보내주도 죽으면 마 보내주야지!”라며 맞불을 놓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실랑이가 오갔다. 


“그거 가지러 가시다가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다고요!” “알고 있다! 그래도 개안타고! 그기 내 한테 어떤 집인지 아나!” 강하게 막아서는 내 모습에 할아버지는 그 집과 얽힌 당신의 70년 인생사를 들려주었다.

 

KakaoTalk_Photo_2023-03-14-14-09-16.jpeg


할아버지네 집은 시골에서 아버지가 부동산 관련 사업을 해서 나름 풍족했다고 한다. 다만 가정 폭력을 못 이긴 어머니가 도망을 갔다. 혼자 남은 9살의 할아버지는 보자기에 생필품만 넣고 도망쳐 서울에 올라왔다. 20대까지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맞아가면서 일만 했더니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할아버지는 그 돈 전부를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을 써먹어서 상가 하나에 투자했다. 그런데 그게 사기일 줄 누가 알았을까. 다행히 공장에서의 평판이 좋아 공장 사장님이 나서서 도와준 덕분에 사기꾼을 감옥에는 넣었지만 돈은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연이 되어 사장의 딸과 결혼을 했다.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보고 자란 게 없어 버는 돈을 그대로 다 모아 지금의 그 집을 사서 아내한테 주었다고 한다. 선물 준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무리를 했는지 아내는 집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몇 개월 동안 삭신이 쑤신다는 말만 일삼았는데 알고 보니 뼈에 전이가 된 유방암 때문이었다. 


아내는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할아버지는 더욱 일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점점 쌓여 가는 돈을 쓸 곳이 없어서 아내를 생각하며 집만 꾸미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적으로 하던 건강검진에서 몇십년 동안 계속 흡입해온 공장에서 다루던 물질 때문에 폐암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마음 이해 못 하나”


“선생님요, 내가 죽을 때 이 집을 못 들고 가는 걸 몰라서 이라는 거 같나. 거는 내가 집사람한테 처음으로 좋은 거 사준 기다. 근데 그것도 제대로 못 누렸고 내도 쌔빠지게 일한 대가로 지금 이러고 있다 아이가. 그 집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남은 증거물 아이가.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 우리 집사람이 있었다는 증거! 이렇게 빼앗기면 내 죽는 기다. 가다가 죽더라도 내가 시도는 해봐야 한이 없지 않겠나. 이 마음 이해 못 하나.”


이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그날 오후에 바로 퇴원했다. 70년간의 인생 이야기에서 매일같이 자랑하는 자식 이야기는 왜 빠졌는지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실랑이를 벌이다 퇴원 준비를 빨리 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라 이내 곧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정말 목숨을 걸기라도 했는지 할아버지는 내가 법적으로 문제없는 퇴원을 위해 내민 수많은 정 없는 조건에도 반박 한 번 하지 않았다.


외출 중 사고는 병원 책임이 되므로 외출이 아닌 퇴원으로 나가실 것, 퇴원의 위험성, 특히 갑자기 임종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숙지한 채 환자 의지로 퇴원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의퇴원서’를 작성하고 가실 것, 집이 왕복 2시간 거리이므로 2시간 지나도 연락 없으면 병원에서도 연락을 취하지 않을 것 등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선을 긋는 통보였다. 

오야 오야, 하면서 동의서에 서명을 마친 할아버지는 내 손에 체크카드를 쥐여 주고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병원을 떠났다. “가다가 죽었는데 병원에 못 낸 돈이 있을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


내 생애 가장 긴 2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서류상으로는 방어를 다 해놓았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되뇌었지만 카드를 쥔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두 다리는 1층 병원 입구에서 도저히 가만있지를 못했다. 

영겁 같은 2시간에서 10분이나 더 지나서야 택시 하나가 병원 입구에서 멈추더니, 누가 봐도 몇십년 되어 보이는 분홍색의 보자기를 가슴에 품은 할아버지가 흰자위를 뒤집고 들어오며 외쳤다. “선생님요, 내 산소 좀 도!!!! 숨넘어간다!!!!”


“그건 지금도 좀 미안하제?”


상경할 때 메고 왔다는 보자기 이야기를 왜 이렇게 자주 하시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보자기 안에 집 서류가 숨겨져 있었다. 병원에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았던 ‘내 새끼’는 사람이 아닌 마침내 다시 당신 품속으로 넣어 온 ‘그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서초동 소재의 아주 넓은 단독주택이었다(갑자기 할아버지의 행동이 더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자식은 반복된 유산으로 인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집문서를 손에 쥔 할아버지는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1년 가까이 입원하면서 더 기운을 차렸고, 그 1년 사이 신약 항암제가 개발되어 항암 치료를 다시 받았다. 신약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아 대부분의 종양 크기가 줄어서 절제 수술도 받았다. 지금은 한 군데에만 암이 있는데 크기가 몇 년째 커지지 않아서 검사만 꾸준히 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가끔 생각나면 전화를 거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내 살린 거 알제? 근데 거 집에 보내 줄 거면 땡깡 직이지 말고 진즉에 보내 주지! 그건 지금도 좀 미안하제?”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할아버지를 살린 건 항암 치료고 그마저도 극히 일부의 매우 기적적인 경우다. 발을 동동 구르던 2시간 10분의 순간으로 돌아가면 지금도 이유 모를 화가 불쑥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건 아마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일 것이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