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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1월 02일 (금)

우리의 한의학 ⑨ 2000년이 쌓인 한의학 창고, 정리가 가능한가?

우리의 한의학 ⑨ 2000년이 쌓인 한의학 창고, 정리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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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시계가 오후 5시를 지나 6시를 향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 살아온 흔적을 정리하고 있다. 오래된 물건, 편지, 책, 일지를 살펴보고 버리기 시작한다. 와! 학력고사 수험표, 군번줄. 어! 청춘과 한의학을 같이 사랑하고 고민한 동기와 후배들, 우주 진리와 한의학 정수(精髓)를 터득하기 위해 함께 수련한 도반들. 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썸 탈듯하다가 잠수 탄 그 여인. 

과거의 발자취와 이름이 기록된 일지 버리기가 제일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집착이고 저장 강박이다. 요즘 정리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어 정리의 철학, 힘, 방법, 효과 등을 이야기한다. 또 TV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보면 정작 삶터의 주인공이면서도 어찌 못하는 공간과 물건들을 전문가들이 시원하게 정리해준다. 정리를 잘하면 환경이 바뀌고 이에 따라 인생이 변화하고 행복이 찾아오고 성공도 부자도 된다고 한다. 

한의학 교과서, 공책, 어렵게 구한 중의서, 관(觀) 통한 선생님과 원장님 강의록들을 들춰본다. 지금은 읽지도 못하는 한문책, 본초·방제를 보기 좋게 요약한 공책, 특강 온 선배님들의 비방을 언젠가는 쓸 것으로 알고 꼼꼼히 적어놓았다. 이 행위와 과정을 통해 개인적 한의학 체계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학생 시절엔 이 모든 지식들은 배우고 깨달아야 할 중요한 화두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하면, 헛된 열정과 성실, 시간을 허비한 의미 없는 강의, 현실성과 실용성이 떨어진 내용들도 있다. 


왜 사용도 않는 한약재를 기재해 불신을 자초할까? 


공책에 있는 수많은 한의학 용어들, 특히 병명과 증상명. 이들 중에 이 시대 한의사들이 한번이라도 사용한 용어와 진료부에 살아있는 병명과 변증명은 몇 개일까? 이들은 지난 2000년 동안 한의학이 이룩한 위대한 체계와 업적들을 단어로 열거해 주고 있지만, 이런 질병을 가진 환자가 한의원에 오지 않는 현실을 탓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진 인체·질병 이론과 개념들. 고대 중국인 수준으로 설명하여, 더 이상 깊이 있는 내용도 없고, 현재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모르니, 한의대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서로 힘들게 가르치고 배웠다. 하지만 이런 이론과 개념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였다는 논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변증 논치 체계와 질병별 변증 논치를 보면, 한의사 제도가 생긴 지난 70년 동안, 몇 십억 명 환자의 각종 병명에 어떤 변증이 얼마만큼 적용되었을지 궁금하다. 현재 의료현장에 없는 용어들, 어디에 응용하는지 모르는 이론과 개념, 진단 치법 결정에 적용 안 되는 변증 논치, 구별도 힘든 질병별 수십 종 변증들과 이에 연계된 한약처방들을 왜 가르치고 시험을 쳤던 것일까? 

본초 공책을 살펴보면, 일부 한약재는 현재 모든 한의사가 500g이라도 투약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당구장 표시가 되어 있다. 어떤 한약재는 유통 및 사용하지도 않는데, 다른 의약단체들로부터 투약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왜 사용도 않는 한약재를 교과서에 기재하여 한약 전체를 불신하게 자초하는 것일까? 방제학 공책에는 기본방 가감방 까지 몇 백 개가 수록되어 있지만, 다른 한의서에는 수 만개가 될 것이다. 

 

최근 30년 동안 한의계 내에서 임상 증례보고 1건이라도 있는 한약처방으로 제한한다면, 몇 개의 처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까? 고전 한의서에 흔적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투약 사례도 없는 의약품을 본초·방제 교과서에 수록하는 이유가 단지 전통 개념과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인가? 난해하고 복잡하면서 핵심도 없는 여러 진단법과 침법들을 도표로 만든 족보들. 2020년 11월 오늘, 임상 현장에서 한의사가 사용하는 진단법과 침법 또 사상체질 감별법, 이제마 선생님 이후에 국내에서 새로 발명되고 발견된 체질 감별법은 몇 개일까? 여기에 더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가 새로운 최신 진단법과 침법을 창조하여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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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의학 지식들은 버릴 수 없다고 믿는가?


불현듯 한의학은 정리가 가능한 학문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한의학이 신학, 철학, 한문학, 서지학 등의 인문학 계통이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상과 신념이 최고 우선시되고, 문헌 근거가 소중하면서, 그 뜻이 무슨 뜻인지가 중요하고, 오직 말씀과 문자로만 표현되는 학문 체계로 구성되었다면, 정리한다는 개념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한의학이 과학이고 의료기술이면 이야기를 달리할 수 있다. 과학과 의학은 항상 정리 과정을 통해 가성비 높은 최종 값을 구하는 학문 체계이다. 무수한 신·구 지식들이 몇 백 년을 서로 갑론을박하고 박해를 당하면서 정리되어, 적자생존같이 결국 증명된 최종 지식과 유용한 기술만 남는다.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였거나 그리스·로마시대 과학과 의학 속의 성현 말씀과 사상들은 98% 정리되었다. 이 최종 값 또한 영원한 끝남이 아니며, 또 정리의 수순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러한 복잡계 속에서 개인 인연과 성향에 따라 스스로 취사선택하여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것인가? 한의학이 질병치료의 실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외세와 싸워서 지켜낸 전통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체계라면, 현재 우리들은 무엇을 가지고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 2000년 한의학 역사에서 폐기한 병명, 이론과 개념, 진단법, 침법, 한약재, 한약처방이 하나라도 있을까? 왜 한의학 지식들은 버릴 수 없다고 믿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바람은 단순 간단하다. 모든 의약정보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시대에, 정리되지도 않은 이론과 기술을 배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의학을 통해 철학가나 한문학자, 전통계승자, 전도사가 될 생각이 없다. 현대의학이 주류인 의료사회의 틈새시장에서, 근거 있고 정리된 한의약 기술로 환자 한명 한명에게 최대한의 질병치료 유효성과 안전성을 서비스하면서 의료인으로 사는 것이다. 


한의학을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으로 정리


정리의 제일 원칙, 비움이다. 그러면 누가 비움을 실천할 것인가? 올해 들어 인류가 코로나 사태로 갈팡질팡하는 속에서, 감염내과학회 교수님들이 전문 지식과 권위, 방대한 자료에 대한 냉철한 이성 판단으로, 전체 의료집단에게 지침이 되고 국가 방역 정책의 방향타를 쥐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한의학, 인문학이면 당연히 정리와 관련 없지만, 의학이면 의료 최전선에 계신 한방내과학회 교수님들이 정리에 대한 최고 전문성과 균형 감각이 있지 않을까 한다.  한의학을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으로 정리한다고, 의료 가치가 훼손되고 역량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성장할 것이다. 정리된 한의학으로 학생, 한의사들이 행복하고 성공하였으면 한다.


 (본 글은 저자의 소속기관이나 한의신문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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