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 군의관으로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한의사가 있다. 바로 신홍균 선생이다. 하지만 신홍균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수시로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흘, 신굴, 신포’ 등 그의 수많은 가명들은 아직도 기록들 속에 남아 그의 업적을 증명하고 있다.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되는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일대기를 3부작으로 나눠 조명해본다.
일본군 공격을 위해 대전자령에서 매복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위기에 빠졌던 한·중연합군은 군의관 신홍균 선생의 기지로 극적인 재정비에 나설 수 있었다.
1933년 6월 30일 아침 6시경이 되자 일본군은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행렬의 선두는 화물자동차 부대, 가운데는 우마차대, 후미에는 자동차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당시 일본군은 이케다 신이치 대좌가 인솔하는 회령 주둔 보병 제75연대 소속의 주력 부대 500여명, 산포대 본부 및 산포 2개 중대, 함흥 주둔 보병 제74연대 보병 3개 중대, 기관총대 1개 중대와 야포 2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자동차를 앞세우고 본대가 대전자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후미 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면 총공격을 개시하자고 작전을 세웠지만, 길림구국군의 시세영 부대가 성급히 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개시됐다. 한국독립군은 사격과 함께 바위를 굴려 일본군을 살상하고 자동차와 우마차를 파괴해 적을 완전히 포위·고립시켰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어찌하지 못하고 무기와 차량 등을 버려 도주코자 했으나 거의 궤멸했다.
대전자령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 약 5시간 동안, 일본군은 130명 이상이 살상됐고 대다수 병력이 도주하는 치명적 피해를 입어 일부 부대만이 대전자령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승리한 한·중연합군은 각종 무기, 탄약, 피복, 식량 등 엄청난 물량의 군용품을 노획했다. 이날 오후에 또 비가 내렸고 날이 저물면서 한·중연합군은 이튿날인 7월 1일 아침에 전장을 정리했다.
한국독립군은 대전자령 전투에서 길림구국군과 한중 합작의 형태로 크게 활약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에 버금가는 대표적인 독립군의 활약상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대전자에 주둔하면서 무장을 강화하고 훈련을 시행하는 등 부대를 재편성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사령관인 오의성 휘하의 시세영, 사충항 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훈춘, 왕청 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해 1933년 9월 6일 중국-소련 국경지대의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초기 한·중연합군은 적에게 큰 타격을 줬지만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여러 항일부대와 함께 대전자에 주둔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 해 8월 초부터 길림구국군 사령관 오의성이 한국독립군에게 길림구국군에 합류할 것과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는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해온 것이다. 물론 지청천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참모장 주보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독립군 병사들이 친일반공단체 민생단과 내통하고 있다며 음해를 서슴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오의성은 1933년 10월 13일 밤, 산하 부대를 동원해 330여명의 한국독립군을 강제 무장해제시키고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무고하게 구금했다. 지청천 역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홍균은 다행히 구금되지 않아 남은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했고 곧 선전대와 계몽강연을 나갔던 조경한이 돌아왔다.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경한도 매우 당황했지만, 시세영 등 길림구국군 간부들을 설득해 오의성을 찾아갔다. 조경한의 노력으로 한국독립군은 대다수 풀려났으나 지청천 만은 풀어주지 않았다. 지청천에게 가한 수모를 생각하면 훗날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이에 조경한과 다른 장교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홍균이 불쑥 나서며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50이 되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김소래(김중건)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은 불행히 공산도배에게 학살됐다. 그분의 평일 유명에 의해 지청천 장군의 휘하에 들어와 장군을 유일한 지주로 앙모하고 섬겨 왔는데 또 장군을 잃게 됐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실제로 신홍균은 자결을 시도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목숨을 건 그의 연설에 길림구국군 내부에서는 불명예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됐고 결국 지청천을 풀어주게 된다. 만약 신홍균이 아니었다면 지청천은 필시 사망했을 것이고 1940년대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과 함께 광복군을 설립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뒤에도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여러 고비를 맞이했지만 항일투쟁 의지가 남달랐던 일부 인사들은 동북인민혁명군 등에 참가해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이때 신홍균은 병사들을 인솔해 밀산 지역으로 이동하고 후일을 기약했다. 중경 신문기자 갈적봉이 1934년 5월 작성한 ‘조선혁명기’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동북의 한국독립군은 신흘…등이 인솔해 영안, 목릉, 밀산 등의 산림지대로 이동해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
그가 걸어온 항일의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월남유서에 따르면 1919년 가을 일본 헌병들이 신홍균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동생인 신동균을 살해해 압록강에 수장했다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나온다. 그 뒤 1년 6개월여가 지난 1921년 1월 신홍균은 동생의 복수에 나섰고, 이러한 비통한 감정이 그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함경남도 삼수군 강진면 두지리 헌병 주재소를 습격한 5명의 독립군들, 이튿날 2명을 보충해 다시 습격을 감행.–일본 방위성 헌병대 일지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로서 그가 평생 가졌던 유지는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홍균 선생의 의지를 받든 이들 중에는 비슷한 시기 독립운동가·한의사로서 활동한 조카 신현표와 종손인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도 포함됐다. 현재까지도 신준식 명예이사장은 ‘의술(醫術)이 아닌 인술(仁術)’이라는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의 신념을 자생한방병원 설립가치의 근간으로 삼아 한의사 독립운동가문 후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데 힘쓰고 있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