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약육성법은 한의사가 주체되어야
“한의약육성법은 한의사 육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의약 육성 주체는 한의사가 되어야 하며, 제도적 학문적 발전을 통해 수혜자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16대 20대 한의협 회장을 역임한 송장헌 명예회장(1979.7~1980.3, 1984.4~1986.3)은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한의약육성법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우려했다. 해석상 한의약을 육성 발전시켜 누구에게 던져줄 것인지가 애매하기 때문에 시행령 시행규칙에 집행부가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자칫 약사법 부칙에 한의사가 한약을 조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삭제되면 의약분업 시행과 함께 조제권한이 약사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육성법에서 반대로 전개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의약육성법은 한의약을 발전시켜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는 법적장치가 되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건강식품, 제약회사, 무면허업자, 양약사를 위한 법으로 전락,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했다.
“현 집행부에 기대가 큽니다. 약사법에 조제권을 부여하다 보니 약사들이 육성법에 참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과거의 전례를 보더라도 시행령, 시행세칙 마련에는 관련단체 이외에는 제외되어야 한다”며 당부했다.
한의약육성법 말이 나오자 송 회장은 재임 당시 약사법 개정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던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위 권유로 전임 회장의 잔여임기를 맡는 송 회장이 첫 사업은 다름 아닌 한의약 발전을 위한 대통령 탄원서였다.
주변의 두터운 인맥을 동원해 한의학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책자를 만들어 탄원서와 함께 당시 경호실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전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한의약은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양의약의 식민상태다. ‘한의는 의정국’에 ‘한약은 약정국’의 식민 상태로 남아 있어 한의약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탄원서의 주요 내용인 것으로 기억해.”
송 회장은 당시 박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직접 전달했다는 경호실 모 인사로부터 ‘의사 약사는 국회의원이 있지만 한의사는 국회의원이 없어 정치적으로 밀리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이 사람을 의정회 국회의원을 시켜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탄원서가 전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보사부의 의정국과 약정국이 벌집 쑤셔놓듯 뒤집힌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대외적인 의권이 너무 약해 협회장을 복지부 과장도 제대로 만나주지 않던 시절. 이를 계기로 한의사의 위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주변에서 회장 권유할 당시 송 회장은 한의계의 의권이 미약한 상황에서 한의계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인맥 등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가 회무추진에 힘을 발휘한 셈이다.
송 회장은 청와대 뿐 아니라 정계, 관계 등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한의계의 문제를 부각시켜나갔다.
당시 약사법의 주요 대목은 ‘약국에 설치된 한약장을 철거’하는 일. 그러나 막상 결과가 무르익을 무렵 그해 3월 정총에서 회장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무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약국의 한약장 설치를 지시하는 등 주도했던 민관식 전 약사회장도 6개월 기한만 주면 자진철거를 약속하는 등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인 점을 감안할 때 아쉬운 대목이어다.
그후 84년 다시 한의협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송 회장의 활동은 예전 같은 빛을 발휘했다.
“당시 절치했던 권익현 사무총장이 한의협과 민정당과의 간담회를 열자고 제안해왔어요. 민정당 대표가 되어 약속은 지켜졌지만 민정당 수뇌부가 다 참석했지.”
이날 송 회장은 당시 민정당 정강정책이 ‘정의사회 구현’이란 점을 들어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정의사회가 구현되어야 하며 양약국서 한약장을 놓고 한약을 판매하는 것은 정의사회 구현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면서 “지난 76년 의료보험법에 한방이 포함된 이후 시행되어야 함에도 아직 시행되지 않는 것은 형법 뿐 아니라 정의사회 구현과도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요지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 여파일까. 한방의료보험은 복지부, 당정협의회, 경제기획원, 국무총리 결재를 걸쳐 잘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1차나 2차에 걸쳐 번번히 비서실에서 무산돼 시간만 지연되었다. 만일 3번째가지 결재가 안될 경우 한방의료보험 시행은 언제 시행될지 모른 상황에서 주변의 인맥을 통해 겨우 ‘2년간 시범기간을 조건’으로 전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시범지역 선정도 만만치 않았다. 시험지역 성공 여부가 전국확대 실시로 이어지기 때문. 그래서 선정한 것이 청주 청원 지역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방의보 시범사업에서 첩약이 제외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움으로 남아요. 첩약 의보만 시행되었어도 오늘날 약사 한약조제 문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거야.”
당시 송 회장은 한약업사 문제 역시 해결을 시도했다.
한약업사 수가 만만치 않던 시절 이들에게 한지 한의사 자격 부여를 하는 대신 한약업사 제도를 없애기로 이미 정부와도 어느정도 합의된 상태였다. 이 역시도 아쉬운 대목이다.
송 회장은 재임시절 한(漢)의학의 명칭을 한(韓)의학으로 명칭 변경한 것은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민족의학의 정통성 회복 차원에서 어렵게 통과한 한의학의 명칭은 한국한의학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주요한 기틀이 됐다.
“서울대 한의대 설치를 비롯해 국립동양의학연구원 설치를 요구했어요. 국립동양의학연구원 모델을 오승환 회장 재임시절 서울대 보건대학 교수에게 용역을 맡겨 이미 만들었지.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말이야.”
서울대 한의대 설치는 양방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국립동양의학의학연구원은 훗날 한국한의학연구원으로 빛을 보게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한의계의 요구는 겨국 국립의료원 한방진료부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송 회장은 오늘날 한약을 이용한 건강식품이 쏟아지면서 씁쓸해 한다. 이렇게 가다보면 한방 고유의 정의가 희석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침이 무슨 병을 낫게 하느냐’고 비웃던 양의사들도 이제는 침을 더 선호하고, 십전대보탕 등 한약을 이용한 건강식품이나, 제약 등의 범람이 영 못마땅 한 것이다. 당시는 한약자만 들어가도 식품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무일까.
송 회장이 한의약육성법에 대한 집행진의 노력을 강조하는 대목도 이 때문인 듯하다.
한의사 회관 문제가 나오자 “회관건립은 중요하고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면서 “문종화 전 한의대 동창회장이 시작한 허준기념사업회가 많은 노력 끝에 구암공원에 들어서고 되고 그 곁에 한의사회관이 들어선 것은 의미있는 사업이었다”고 말한다.
이제 명실공히 구암공원은 한의학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의사들도 상업적 운영보다는 의료기관으로 사명을 잊지 말고 책무를 다해야 된다고 봐요. 한의학 발전과 국민보건에 기여해야만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을 여운처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