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양 M&L심리치료 연구원 마스터 트레이너
“중학생 즈음 되는 여학생이 일본 현지에 있는 제 클리닉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아이였죠. 하지만 티 없이 맑아 보이던 그 학생에게 저는 ‘마음의 방’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케이팝에 대한 열망이 있더라고요. 케이팝을 직접 느끼기 위해 한국 유학까지 꿈꿀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열망이 성폭력에 따른 상처와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리소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치료는 한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7일 한국콜마 8층의 한 강의실. 주말 아침으로는 이른 오전 9시인데도 점잖은 차림의 수강생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 있다. 유수양 마스터트레이너가 진행하는 ‘M&L심리치료 전문가를 위한 프로스킬 트레이닝 코스’를 들으러 온 한의사들이다. 그간의 근황을 묻는 유 트레이너의 질문에 한의사들은 앞다퉈 자신의 상담 사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가진 내적 성장의 힘을 믿고 환자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기 위한 내용이었다. 열띤 강의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M&L심리치료 전문가를 위한 프로스킬 트레이닝 코스가 한의사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시간을 들여 환자를 정성스레 치료하는 한의학의 특징이 몸과 마음의 이상 징후를 진단, 치료하는 심리치료와 깊은 관련이 있어서다. ‘Mindfulness and Loving Presence’를 줄인 M&L은 수동적 깨달음인 ‘마음 챙김(mindfulness)’과 적극적 사랑에 해당되는 ‘러빙 프레젠스(loving presence)’ 개념을 이용해 환자가 진정한 자신을 찾도록 돕고 있다. 한국M&L심리치료연구원(대표 천병태)이 지난 2013년 6월 처음 개설한 이 코스는 올해로 5기 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강의를 진행하는 유수양 트레이너는 일본 후생노동성 인증 정신보건지정의로 현재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유 멘탈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유 트레이너는 실제로 한의학과 심리치료는 닮은 구석이 많다고 여긴다.
“저는 한의사 선생님들의 임상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로서 보면 한국의 한의사 선생님들은 맥진, 복진 등 이미 심리치료를 훌륭히 해 온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시간을 많이 들여 따뜻하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심리치료의 중요한 영역입니다. 한의학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여기에 있다고 보는데요.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돈독해져서 생긴 친밀감은 환자의 치유를 돕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을 움직여서 기를 변화시키는 ‘이정변기(以精變氣)’는 한의학 정신치료의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육체의 정(精)을 다스리기 위해서 한약을 쓰고, ‘조기치신(調氣治神)’ 즉 기를 조절해서 정신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쓰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의 내적 리소스를 확대해 상처를 무력하게 하는 M&L심리치료 방식이 ‘사기(邪氣)’가 쇠퇴된 병세에 ‘정기(正氣)’를 북돋는 한의학적 원리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치유 능력을 인정해주고 극대화하는 접근 방법도 한의학의 심신일여(心身一如), 음평양비(陰平陽秘), 염담허무(恬憺虛無), 조기치신(調氣治神) 등의 원리와 겹친다.
M&L심리치료는 ‘마음의 방 그리기(Mentalizing the Rooms of Mind)’라는 심리치료 기법을 사용한다. 자신의 힘이자 고통의 근원인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나 이미지를 구조화·시각화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환자의 내적 힘을 믿기에 도입된 기법이다. ‘유능한 상담자의 심리치료’ 저서를 쓴 스콧 밀러가 심리치료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환자의 리소스’를 꼽은 이유와 일치한다. 밀러는 심리치료에 효과를 미치는 요인 중 환자의 리소스가 40%, 치료자의 성향이 30%, 기법이 15%, 위약효과는 15% 순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마음의 방’을 통해 알게 된 환자의 내적 이야기를 치료의 중요한 재료로 쓴다는 의미다.
◇日 의사, 韓 사상체질로 자신의 체질 이해하기도…한·양방 병용치료 일반적
유 트레이너는 강의를 들으며 임상에서의 변화를 고백하는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작년에 참여하셨던 한 신경과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M&L심리치료법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하셨어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요. 기계적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아닌,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환자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한의학의 사상의학을 배운 일본 정신과 의사들에게 찾아온 변화도 인상적이다.
“일본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체질을 이해하고 병리와 생리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을 때 모두 놀라고 기뻐했어요.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따지기 전에 그 환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임상가로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의학은 현재 일본 현지에서 스트레스에 따른 정신질환, 치매 치료 분야에서 각광받으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스트레스성 정신질환, 공황장애나 우울증과 같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기반한 정신 신경 질환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질환을 치료할 때 한약과 심리치료의 효과를 저의 임상에서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약물요법에서 한약이 주치료약이 되는 경우도 저의 클리닉의 경우 20%가 넘습니다. 주치료약이 양약이어도 한약이 보조적으로 처방되는 경우가 거의 모든 환자분들이 해당됩니다.
지난달에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동양의학회 심포지엄에서 반하백출천마탕과 가미소요산, 계지복령환 등 우울증 치료의 주치료제로서 한약의 임상적 효과에 대해 발표했는데, 일본 의사분들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클리닉의 소아정신과 부분에서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아동학대나 집단 따돌림 피해 아동의 정서장애에 대한 주치료약 또는 보조약물로서 억간산가진피반하, 소건중탕, 반하백출천마탕, 감맥대조탕 등이 대단한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치매에 있어서도 일찍이 일본에서 치매 치료제로 억간산의 효과에 주목했고, 저 자신도 일본 국립병원 치매병동 근무 시 한방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미 있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치매 환자분들의 증상 완화를 위해 더 많은 한방약들이 일본에서 처방되고 있고요.” 이 외에도 정신과 임상에서 한약의 효과에 대해 발표해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고 했다.
현재 15명의 M&L 임상치료 전문가가 배출돼 전국에서 할동 중이다. M&L 분야의 학술 교류와 우호 증진을 위해 열리는 한·일 공동심포지엄은 매해 개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강형원 학회장이 지난해 한국M&L심리치료학회를 창립하고 대한한의학회 정회원 학회 인준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작년부터는 부산, 광주에서도 코스가 개설돼 한의사, 의사, 심리치료사, 교사를 대상으로 강의가 진행 중이다.
“현재 가정 내 폭력 문제나 아동 청소년의 신경 정신 질환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의 부모 역할에 대한 강연이나 출간을 계획 중입니다. M&L심리치료법은 임상현장 뿐 아니라 교육 분야, 양육, 가족문제, 지역이나 직장 내 정신보건 향상 등에도 응용 가능하기에 국가의 보건 정책과 지방자치단체의 생활 속 정신 보건 복지 증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 상담치유 전문가 양성 등 행정 교육 시민 사회복지단체 기업들과 연대를 기반으로 임상진료가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