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학 발전의 지름길은 환자와의 ‘소통’
“계약직으로 입사한 후 지금까지 홀로 한의진료를 맡아왔다. 하루 약 40여명의 환자 중 초진환자를 제외한 20명 이상은 평생 친구다. 서울에 거주하는 국가유공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한의진료를 한번 받아본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한의학이 깊은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유공자와 그 가족의 보건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지난 1953년 설립된 서울보훈병원.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결과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산하 종합병원으로서 약 800병상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정작 서울보훈병원 한방진료과 내 한의사는 한을주 과장이 2003년 입사 이후 유일하다. 5년여 동안 혼자서 여러 명의 단골 환자를 도맡다보니 정확한 병력을 알고 있어 수월할 때도 있지만, 갑작스런 작고 소식을 들을 때면 가족을 잃은 것 같아 힘들 때도 있다고 말하는 한 과장.
보훈병원 최초 정규직 한의사 인정
한 과장은 박사과정과 인턴·레지던트 수료 후 2003년 3월 보훈병원 공공의료한의사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보훈병원은 정규직 한의사가 전무했다. 이처럼 양방이 주류인 현실을 접한 한 과장은 이를 바로잡고 싶어 병원 내 보훈의학회에서 ‘서울보훈병원, 한방진료과 내원환자에 대한 통계적 고찰’의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은 당시 병원을 찾는 환자의 수치와 누적통계를 분석, 확연히 불평등한 현실을 꼬집었다.
한 과장의 노력은 결국 2005년, 보훈병원 내 최초 정규직 한의사라는 결실로 이뤄져 현재까지 환자들이 선호하는 한방진료과의 인기를 실감하게 하고 있으며 타 지역 보훈병원의 정규직 임용도 가능케 했다.
“개원은 하나의 ‘경영’이기 때문에 진료 외에 할애해야 할 부분이 많아 차후에 경험이 많이 쌓이면 도전하고 싶다. 대학원 졸업당시 공직에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며 단순히 환자의 상태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싶어 보훈병원에 입사, 공직 한의사의 부실한 현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한의사의 역할에 대해 어필하기 위해 애썼던 것은 단순히 좀 더 진료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활한 한방진료 환경 구축 시급
한 과장에 따르면 보훈병원은 6·25 및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애국지사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의료비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방진료과의 진료환경은 매우 열악한 상태라고 한다.
보험청구가 가능한 진료에 한정해 환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침술과 한약제제 정도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꽃인 한약 투약이 불가능한 현실 때문에 환자를 되돌려 보내는 것도 수차례, 한방의 원활한 진료환경 구축이 매우 시급함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전반적 치료권이 양방에 치우친 상태다. 혈액·방사선 검사 등을 의뢰하기 위한 의료기사지도권 자격이 없기 때문에 환자의 정확한 진단을 꾀할 수 없고, 이것은 곧 참된 의미의 ‘협진’을 가로막을 뿐이다.
오히려 양방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불합리한 위치이며 보이지 않는 수갑이 손발을 묶고 있다. 보험치료의 확대를 통해 한의진료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할 시점이다.”
보훈병원 내 직원을 비롯 많은 환자들에게 한의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자부심보다는 책임감이 더 크다는 한 과장은 ‘능력’ 위주의 냉철함을 주장했다.
“‘능력’이 있어야 지도권 행사가 가능하며 양방과 대등한 관계의 입지를 펼 수 있다. 의학은 항상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한의학은 고전적인 면에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진단기기뿐 아니라 고전 진단명의 사용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한 과장은 일찌감치 한의학의 방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서울보훈병원 내 한방진료의 필수적인 위치를 확보, 한의학 발전의 지름길로 환자와의 소통을 짚은 것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학부 과정부터 의료기기사용이 가능한 커리큘럼 확보, 통일적인 진단기준과 이해하기 쉬운 진단명의 통용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의사의 한마디가 환자의 운명을 바꿀 수 있어 소홀함을 최대의 적으로 삼고 있다”는 한 과장의 당찬 걸음이 널리 뻗어 나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