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신문] 대한한방내과학회(회장 고창남)가 지난달 18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개최한 ‘제72회 대한한방내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초청강연자로 나선 일본 아이치현의 정신과 전문의 구스노키 마사토 의사는 “정신과 영역에서 한약은 양약 만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전혀 새로운 치료 경험을 제공한다”고 밝히며, 뇌 병태를 기반으로 한 한약 활용의 임상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스트레스 반응의 뇌 병태 통해 한약의 타겟 이해해야”
심·한방 구스노키 의원을 운영하면서 △정신과 △심료내과 △한방내과를 표방하는 통합진료를 실천하고 있는 구스노키 의사는 이날 강연을 통해 글루타민산·세로토닌 신경계 조절을 타겟으로 한 ‘억간산’ 계열 처방의 임상 적용을 중심으로 다양한 증례를 소개했다.
구스노키 의사는 “스트레스는 뇌의 청반핵을 중심으로 한 노르아드레날린 시스템, 그리고 글루타민산·세로토닌 신경계에 과활성화를 유도하며, 이는 다양한 정신과 증상의 병태적 기반이 된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이에 대응하는 한의약적 병태로는 기울, 혈허, 기허, 수독, 간·심실조(肝·心失調) 등이 있으며, 이와 연결되는 임상증상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 한약 치료의 강점”이라고 밝히며, 다양한 정신과 분야에서 스트레스 반응의 뇌 병태에 활용할 수 있는 한약처방에 대한 기전 및 임상사례 등을 공유했다.
억간산 계열 처방, 사고보속·불안·위장장애 등 통합적으로 조절
이날 구스노키 의사가 가장 먼저 소개한 처방은 ‘억간산’과 ‘억간산가진피반하’다. 그는 억간산은 원래 소아의 경련 및 정신불안을 치료하던 처방으로, 현대 임상에서는 불안, 초조, 사고보속, 불면, 신경과민 등의 스트레스 반응성 증상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억간산의 주요 작용기전은 △글루타민산 신경계 안정화(신경세포 과활성 및 독성 억제, 신경 보호) △세로토닌계 안정화(5-HT1A 수용체에 대한 partial agonist 작용으로 불안 완화) △GABA계 활성 및 산화스트레스 억제(GSH 증가) △위장기능 조절 및 영양 소모 보완 등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특히 만성적인 병태이거나 위장기능 저하가 뚜렷한 경우에는 진피·반하를 추가한 ‘억간산가진피반하’가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시호가용골모려탕, 섬망 유사 상태 및 스트레스성 흥분 병태에 ‘효과’
억간산에 이어 ‘시호가용골모려탕’에 대해 설명한 구스노키 의사는 “이 처방은 상한론에 기반해 감염성 섬망 유사 병태에 사용되던 것으로, 오늘날에는 심한 초조, 불안, 정서적 흥분이 동반된 우울 상태, 혹은 치매의 흥분형 BPSD 등에 활용 가능하다”면서 “작용기전은 △글루타민산 흥분 독성 억제 △염증 반응 조절을 통한 신경세포 보호 △세로토닌·도파민 분비 감소 억제 △Ca·Mg 보충 효과를 통한 신경안정 등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구스노키 의사는 억간산이 인지장애(BPSD)에서도 유효하다는 일본 임상연구결과를 소개하면서 “알츠하이머병, 루이소체치매, 혈관치매 환자에게서 억간산이 망상, 환각, 흥분, 공격성, 초조 등의 행동증상을 줄이고, 항정신병약의 감량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히는 한편 “특히 억간산은 소아의 심신불안, 성인의 스트레스성 불안장애, 노인의 BPSD까지 관통하는 처방으로, 각 연령대별 이 증상들의 병태는 다르지만, 뇌의 신경과학적 기반은 유사한 만큼 억간산은 관련 질환에 모두 통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日 정신과에서의 한약 활용, 치료의 일부로 ‘자리매김’
강연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일본 내 정신과 임상현장에서 양약과 한약의 병용 시 상호작용에 대한 우려 제기는 없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거의 그렇지 않다”고 답한 구스노키 의사는 “일본에서는 정신과에서 한약과 양약을 병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고, 실제로 부작용 사례는 드물다”면서 “오히려 병용으로 인해 약물 용량을 줄이거나 부작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한약 또는 양약 중 하나를 무조건 배제할 것이 아니라, 병태에 따라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이것이 일본에서 한약이 정신과 치료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배경”이라고 밝혔다.
특히 구스노키 의사는 “억간산은 불안과 갈등에 대응하는 약이고, 시호가용골모려탕은 흥분과 과항진에 대응하는 약”이라며 “뇌 병태와 신경회로를 이해하면 정신과 영역에서의 한약 처방 활용법이 훨씬 명료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권승원 대한한방내과학회 학술이사는 “구스노키 의사의 발표는 정신과 병태의 신경기전을 기반으로 한약 처방의 근거를 제시한 매우 실용적 발표였다”면서 “이번 강연을 계기로 한국 임상에서도 정신과 영역에서의 한약 치료가 보다 체계화되고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