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강환웅 기자] 일제강점기 경성 지역 한의원의 이용 실태를 분석한 연구결과가 A&HCI 저널인 ‘의사학’의 표지논문으로 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 지역 한의원 이용 실태: 1931년 보춘의원 ‘장부’ 분석을 통해 본 경우’란 제하의 이번 논문은 전종욱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한의사·사진)가 제1저자로, 신동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장이 교신저자로 참여했다.
보춘의원은 근현대를 대표하는 한의사인 청강 김영훈 선생이 60여 년간 운영한 곳으로, 약 12만건의 진료부와 처방전 등 대량의 자료가 남아있다. 그러나 ‘장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소책자는 1931년 자료가 유일하며, 이번 논문에서는 1931년 전체 내원자를 정리한 이 소책자를 중심으로 내원자 인물군, 거주지, 약가 결제양상, 개별-가족 또는 내원-왕진 진료양상, 처방 내역 등의 분석을 통해 당시 한의원이 이용 양상을 분석했다.
이번 논문은 청강 김영훈 선생에 대한 배경적 이해를 시작으로 1931년도 보춘의원 ‘장부’ 속 환자 인물군을 △‘장부’를 통해 본 내원자 실태 △유력자들의 의약생활 양상 △보춘의원 내원자의 지역 분포에 대해 분석하는 한편 ‘장부’ 속 처방 약가(藥價) 및 진료·결제에서는 △보춘의원 처방과 약가 개요 △보춘의원 특수 단방과 특정 진료 △1년 주기 이용 패턴과 결제 양상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보면 이용자는 진료비 총액으로 근거해 볼 때 유력층이 지배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고, 집안 단위로 대가족이 빈번하게, 또 다양한 처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민씨 일가 민병주·민대식·민병석 등 3개 가(家)가 (진료비 기준 한 해 총액의)40%를 넘는 비율을 보이고, 경일은행장 장길상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도 한약을 복용하는 것은 물론 여행을 떠날 때 상비약을 처방받는 등 다양한 한약의 활용 폭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역 분포는 보춘의원이 위치한 낙원동에서 반경 1km 내에 다수가 존재하지만 강화나 개성 같은 곳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경상도·전라도·황해도에서 방문하는 환자도 많은 등 서울 이외 지방 내원 환자가 22%를 상회했다.
특히 1931년 보춘의원에서는 1000여 종이 넘는 처방을 내리면서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진료 처방 역시 주요 기본방 수십 가지가 빈번하게 쓰였지만 한 번만 쓰인 약도 52%를 넘을 정도로 처방 선택의 범위가 넓었다.
보춘의원에서 많이 처방된 약을 총액과 빈도 순으로 살펴본 결과 청심환·소합원 같은 구급약을 비롯해 관음고, 가미화위탕, 가미온위탕, 가미이음전, 가미귀비탕, 가미지황탕, 가미화위전, 가미온중탕 등 비위를 보하거나 간신을 보하는 보약들이 많았지만, 반대로 낮은 가격대의 형응환, 일청환 등도 상비약으로 많이 처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키니네 등 새로운 신약 제제도 한의진료에 허용, 여성과 소아를 중심으로 널리 쓰이는 부분도 확인됐다.
보춘의원에서는 주요 진료과목으로 상한, 중풍, 부종, 노채와 함께 탈영실정(脫營失精)을 내세웠다. 이중 탈영실정은 김영훈 선생이 정신병을 일으키는 7가지 사례 중 첫 번째 제시한 것으로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일이 순순히 잘 되어 나가다가 하루아침에 큰 변괴를 당하여 신분이 몰락해지고 재산을 박탈당하여 알거지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소위 화병”이라고 설명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질병의 연속성에 ‘화병’이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번 논문에서는 한 해 동안의 자료 분석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장부’를 통해 당시 한약 사용의 관행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1년 단위로 봄, 가을에 가족이 모두 예방 차원에서 보약을 지어먹는 것 △경제적 여유가 있을 경우 다른 무엇보다 충분한 구급약과 보약을 선택하고 확보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점 △주요 내원자층이 확실히 존재하면서 일회성 내원자의 비율 또한 커서 그에 대한 처방 종류와 범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이 확인됐다는 것.
이와 관련 전종욱 교수는 “보춘의원의 내원환자 대부분은 김영훈으로 대표되는 한의약의 상징 곧 기존의 왕실 전통에서부터 오래 활용되어 온 한의약에 대한 높은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었고, 한의약에 대한 효과를 인정해 방문했을 것”이라며 “더불어 김영훈 선생은 동제의학교 교수의 신분에서부터 전통 지식을 넘어 신문물을 수용하는 노력도 적극 전개하는 등 문명의 조류에 적극 올라타면서도 그 자체의 합리성을 내면화해 한의약이 나아갈 미래의 길을 열었다는 것을 ‘장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