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수 원장
대구광역시 이재수한의원
상강(霜降)이 지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고요하다. 대구 수성구희망나눔위원회 회원들과 ‘소통·힐링 워크숍’을 청도로 다녀왔다.
요즘의 핫플레이스에서 레일바이크를 체험했다. 모두가 처음이라고 하니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회원들이 4인 1조로 나뉘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각자가 페달을 밟는다. 철로 주위에는 붉은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먼 산은 단풍이 아름답게 익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40분 정도의 거리인 왕복 10km를 어느새 도착했다.
청도에 오는 내내 어느 회원이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요. 회장님”이라고 기쁜 마음을 열어 보인다. “그러게요. 아마도 여러분이 봉사를 많이 하고 해서 그렇겠죠”, “이는 다 여러분의 맑은 기운 덕입니다”라고 격려와 응원을 했다.

다음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건물 입구의 “수성구희망나눔위원회를 환영합니다”라는 전광판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갑작스럽게 두 사람에게 ‘새마을 노래’를 시키는 게 아닌가.
“새벽종이 울렸네ᆢᆢ … 우리 힘으로 만드세~~~” 다 함께 노래를 불렀고 전시실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새마을 운동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사진과 기록들 그리고 소품들이 1층과 2층에 시대적으로 잘 진열되어 있다. ‘새마을 정신’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

청도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청도읍성’을 들러보는 시간도 가졌다. 청도읍성 근처에서는 보물 제323호 지정된 석빙고를 들러봤다. 조선 숙종 39년(1713)에 축조됐다. 천장은 무너져 내부를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빙실(氷室)의 크기는 길이 14.75m 너비 5m 반원아치형의 지붕인 홍예 높이는 4.4m”라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겨울의 얼음을 이곳 석빙고에 옮겨 여름에 꺼내 사용하는 조상들의 지혜에 모두가 공감하는 눈치였다.
“석빙고는 동서로 뻗은 구조로 경사진 바닥에 가운데 물이 빠지고 환기구의 역할을 하는 등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라고 한다. 석빙고 왼쪽 석비(石碑)에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기록으로 전하며 지금은 흔적이 많이 사라져 안타깝다.
“읍성에 말 모형이 왜 있는지 아세요?”라고 해설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는 민간의 말을 빌리고 말에 관한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관아인 고마청(雇馬廳)이 있었고 지금 말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라는 얘기를 듣고서야 처음에 다소 의아했던 것들을 이내 수긍했다.
“요즘의 렌터카처럼 말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아마 세계 최초의 렌트카 사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지요”라고 했다. 순간 회원들은 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청도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인 화양읍에 위치한 남고북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한 석축성이다. 북쪽을 제외하고 주산인 남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읍성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당시 성곽은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은 것을 1590년(선조 23) 군수 김은휘에 의해 착수하여 1592년(선조 25)에 석축형으로 고쳤다”라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성벽 위를 거닐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자연의 시원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봄이 되면 복사꽃이 만발했으나 지금은 많이 사라져 아쉽다”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니 왠지 섭섭한 마음이다.
“임진왜란 때 동 서 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다가 그 후 다시 성벽의 수축(修築)과 문루(門樓)의 재건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제대로 성으로서 방어 기능을 하지 못했다”라는 해설사의 웃픈 얘기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으로 다시 성곽이 헐리고 문루가 제거되었다”라고 뼈아픈 역사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 "읍성 안에는 6․25 동란 때 전재민이 모여 살면서 다행히 성벽의 바닥과 일부만이 남아있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전란 속에서도 성벽이 그나마 지금껏 버텨준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오랜 역사의 흔적과 아픔을 간직한 것은 후대의 몫으로 남겨둔 듯하다.

청도군의 옛 지명은 도주라고 해 그 이름을 딴 ‘청도 도주줄당기기’가 유명하다. 이곳 읍성에서 매년 열려 원혼들을 달랜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잠시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가을의 하늘을 바라본다.
조선시대 객사인 도주관을 들러본다. 지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객사 안에는 중앙에 정청과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다.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곳이다. 동헌과 서헌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숙박시설로 되어 있다”라고 한다.
이 건물 앞에는 고종 8년(1871년)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외세 침략에 대해 거부하는 의지를 세운 대원군의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시대를 읽지 못한 대원군의 우둔한 정치 이념을 떠올리면 현 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오버랩된다.
마지막 행선지는 어느 동위원장의 배려로 그의 전원주택에서 바비큐를 곁들인 오찬과 함께 윷놀이 등으로 즐거움을 만끽하는 하루였다. 후원에 500년 된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회원들과 화합을 결의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집으로 오는 길 오늘의 여운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수동 시인의 ‘동행’을 읊는다.
“꽃 같은 그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에 10번 변하겠지만
나는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읍성: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