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던 환자, 완치돼서 나타나

기사입력 2024.07.2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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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 웰빙 & 웰다잉 26
    “결국 나를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은 환자분들이었음을 여실히 느끼게 돼”

    김은혜 원장님(최종).jpg

     

    김은혜 치휴한방병원 진료원장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원장의 글을 소개한다.


    얼마 전, 병원을 지나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혹시, 김은혜 선생님인가요?” 돌아보니, 내가 인턴 첫날, 의사 인생 제일 처음으로 뵈었던 대장암 환자분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3년 동안은 우리 과에 계속 오셨는데 그 후로는 연락이 끊겨,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가슴 한편에 또 한 분, 묻어두었던 환자였다. 하지만 수년 만에 만난 환자의 얼굴은 오히려 내가 못 알아볼 정도로 건강한 혈색을 갖고 있었다. 

    “저 완치되고도 몇 년 지났어요. 지금은 진단받기 전보다 오히려 더 건강하게 보내고 있어요.”


    꽤 오랜만에, 내가 담당했던 환자 중 완치 판정을 받고, 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드문 경우를 마주한 날이었다. 

    새삼, 누군가의 희망이 또 다른 혹자에게도 벅찬 감정을 정말로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싶은 감회를 느꼈다. 어쩌면 이날 만났던 환자가 내 첫 환자이자, 가운을 입은 이래로 가장 서툴렀던 때에 함께했던 분이어서 더 설명하기 힘든 감격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말 한마디가 모종의 긍지심을 자극


    태어나 처음으로 병원의 ‘스테이션’이라는 곳에 발을 디딘 순간, 한 간호사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었다. “암센터 담당 인턴쌤 누구세요? 지금 당장 케모포트 인설션이요!”


    ‘대학병원은 3월에 가면 안 된다.’라는 말의 장본인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일을 시작하기 전, 교육 자료로 보았던 ‘케모포트(chemoport)’라는 관을 ‘인설션(관 삽입)’한다는 행위를 출근 첫날부터 해야 된다는 생각에, 출근한 지 10분 만에 사표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원래는 이제 갓 주치의를 맡은 레지던트가 먼저 보여줘야 하는 게 원칙인데, 그때가 하필 응급상황이 연달아 터져 병동을 맡고 있던 모든 레지던트들이 다 정신이 없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 눈치 없게 아무나 붙잡고 ‘제가 이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징징거릴 용기도 없었다.


    결국, 유튜브를 틀고 케모포트에 들어갈 니들(바늘)을 세 개 들고 와서 하나는 교육 때 받았던 모형에 대고 여러 번 연습했다. 다행히 해외 의료진들이 올린 영상에서는 환자들이 아프지 않게 빨리 잘 넣는 방법까지, 직접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고 있어서 어느 정도 감은 알았다 싶은 때가 왔다. 


    그리고 다른 한 개를 꺼내서, 내 몸 중 살이 가장 많은 부분을 철저한 소독부터 바늘 삽입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개를 챙겨 환자에게로 나섰다.


    의사는 환자 앞에서 절대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므로 나름대로는 짐짓 엄숙한 태도로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나보다 병원 생활이 더 베테랑이었을 환자 눈에 내 긴장과 초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나 또한 환자가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정도였으니 실로, 매우 어설펐던 의료진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춤거리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환자는, 문득 씨익 웃더니 “잘 부탁해요.”라고 말 한마디를 건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말 한마디가 그날 일말의 실수 없이 부드럽고 순탄하게 모든 과정을 끝낼 수 있었던 이유의 전부였던 것 같다. 물론, 사람의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말 한마디가 ‘잘 부탁해. 너를 믿고 내 몸을 맡길 테니,’라는 의미로 다가왔었다. 


    그 당연한 말이 의료인으로 해야 할 도리를 한 번 더 일깨워, 한층 더 무거워진 책임감으로 탈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후로 지금까지도 어떤 환자를 보든 간에 같은 책임감이 들었던 것을 보면, 그 말 한마디가 모종의 긍지심을 자극했던 건 분명했다.

     

    김은혜 원장님2.jpg


    각종 관들과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 반복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 환자가 전신의 부종으로 인해 케모포트를 포함한 모든 관뿐만 아니라 피를 뽑는 것조차 한 번에 성공하기 힘든 케이스임이 밝혀졌다. 또한, 어설픈 3월의 의료진 모습을 직시하고도 그렇게 웃으며 반응해 주는 환자도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제 목숨을 맡긴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뚝딱이고 있는 의료진을 보면 컴플레인이 쏟아지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이 환자에게 나는 고마움과 동시에 ‘내 처음을 지켜주었던 것처럼, 이제 내가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후로, 피 뽑기, 각종 관 소독, 위장관 출혈 세척 등 인턴으로서 어렵다 싶은 처치들의 모든 처음을 나는 이 환자를 통해 배웠었다. 우리끼리 하는 말에 ‘환자와의 관계는 첫 만남에 정해진다.’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런 건지 신기하게도 모든 처치들이 내 첫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환자에게는 백발백중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기에는 너무 낮은 확률의 연속이었고, 나의 술기 실력이 타고났다고 보기에는 한참 뒤에 다른 환자에게는 몇 번 실수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업무에 익숙해지고 나서도, 간헐적으로 이 환자의 술기 실패 소식이 들려오면 어김없이 내가 불려가 대신 해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면, 환자는 병원에 있는 내내 끊임없이 각종 관들과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은, 언젠가부터 한 움큼씩 쑥 빠지는 머리카락이 끝내 거추장스러웠는지 머리를 깔끔하게 싹 다 밀고 왔었다. 

    그 전에 가끔 ‘머리는 절대 안 밀고 싶다’라는 말을 장난스럽게 했던 적이 있었는데, 결국 그 상황이 오고야 만 것에 울적했는지 몇 분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조금씩 쳐지며 붉어지기까지 하는 눈가에, 다가가서 “미인은 원래 머릿발 안 받는다더니, 요리 봐도 조리 봐도 여전히 예쁘시네요.”라고 나 또한 장난스럽게 말하자 금방 꺄르륵 웃어내고는 거울을 구석으로 치워버렸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항상 긍정적으로, 그리고 사랑스럽게 승화시키려고 다분히 노력하시던 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사는, 결국 항암치료가 중단되고 중환자실로 가게 된 날 나누게 되었다. “잘 회복하셔서, 저희 또 봐요.”라고 말하자, “당연하지. 그간 고생 많았어요. 근데, 나 또 올 거야. 무조건.”이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중환자실로 보내드리고 며칠간은 온라인상으로나마 차트를 몇 번씩 보곤 했는데, 볼 때마다 나빠지는 상태에 나중에는 내가 읽기가 버거워서 덮어두었었다. 그와 동시에 이때가,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라는 슬픈 예감으로 마음 저편으로 밀어놨었던 순간이었다.


    “결국, 의사는 환자에게서 배운다”


    그런 마지막 순간을 흘려보내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며칠 전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나 중환자실 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좀 나아지고 마지막이라 생각한 바뀐 항암제가 효과가 너무 좋았어요. 그 덕에 완치된 거잖아요.”

    그 방긋 웃는 얼굴로부터 듣는 희소식에, 왜 내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 했는지 모르겠다. 막상 나아지니 병원은 꼴도 보기 싫어서 안 왔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 내 생각은 났다며, 말을 덧붙이는 환자 앞에서, 감격으로 목이 메는 것을 겨우 숨겼었다.


    ‘결국, 의사는 환자에게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마치 내가 그들의 무언가를 손에 쥐고 들었다 놨다 하는 듯하지만, 결국 나를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은 환자분들이었음을 여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지난 글에서도 거듭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흔적이 다른 이들에게는 희망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며, 또한 그 흔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언젠가는 꼭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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