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로서의 지석영의 삶을 재조명해보자”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지석영선생(1855∼1935)의 한의사로서의 생애를 연대기로 정리해본다. 각종 자료에서 지석영을 의사나 의학교육자로만 정의하고 있고 그의 한의사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어 왔다. 우두법의 도입과 보급, 의학교 교장으로서의 활동 등 위대한 업적을 낸 한의사 지석영의 활동에 대해서 앞으로 더 많은 심도 있는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아래에서 그의 한의사로서의 활동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본다(이하, 도서출판 아카데미아에서 1994년 출판한 『松村 池錫永』의 ‘송촌 지석영 연표’를 참조함).
○철종 6년(1855년) 5월 5일 儒醫 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출생. 어려서 아버지의 친구 한의사 朴永善(1832〜?)으로부터 한문과 한의학을 수학했다.
○고종 13년(1876년) 5월 29일 박영선이 김기수의 수신사 수행의사로 따라가서 久我克明이 저술한 『種痘龜鑑』을 구해서 지석영에게 줌.
○고종 16년(1879년) 10월. 부산의 濟生醫院에 가서 두 달 동안 戶塚積齋에게서 종두술을 배움. 痘苗(毛管五本入) 3개와 種痘針 2개를 얻어서 한성으로 돌아옴.
○고종 17년(1880년) 2월에 한성에 우두국 설치. 5월에 김홍집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감. 7월 일본 내무부 위생국 牛痘種繼所에서 학습. 種苗의 제조법과 採痘痂收藏法, 犢牛飼養法, 採漿法 등 공부. 9월 귀국후 種痘場을 차리고 시민들을 계몽, 본격적인 우두접종 사업을 실시하기 시작.
○고종 19년(1882년) 10월, 어사 박영교가 지석영을 초빙하고 勸種牛痘文을 散布, 지석영 전주에 牛痘局 설립.
○고종 22년(1885년) 5월에 『牛痘新說』발행.
○고종 32년(1895년) 10월 7일에 種痘規則 반포. 11월 7일에 種痘醫養成所 규정 반포.
○광무 2년(1898년) 11월 7일에 지석영이 의학교 설립을 건의.
○광무 3년(1899년) 3월 28일에 지석영이 의학교 교장에 임명됨.
○광무 6년(1902년) 11월 17일 「楊梅瘡論」을 皇城新聞과 帝國新聞에 투고.
○광무 7년(1903년) 3월 24일 勸種牛痘說을 皇城新聞에 투고.
○융희 2년(1908년) 1월 1일 지석영 大韓醫院 學生監 奏任 二等 五級.
○융희 4년(1910년) 6월 23일 陞敍 勳 四等, 八卦章. 9월 20일 退官, 一千圓 下賜證書.
○1914년 1월 19일. 醫生免許 제6호로 등록. 계동 106번지에서 유유당을 개설하고 봉사 시작.
○1915년 2월 全鮮醫會 會長에 선임.
○1916년 한의학학술잡지 『東醫報鑑』창간호에 ‘朝鮮醫學의 由來와 發展’이라는 제목의 글을 투고.
○1917년 10월 李應善이 설립한 朝鮮病院 원장에 취임.
○1928년 12월 6일 조선종두50주년 기념식에서 지석영 표창.
○1933년 성주봉이 『한방의학강습서』를 간행할 때 서문을 써줌.
○1935년 2월 1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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