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일본으로, 동인으로 고증 가능한 근세(近世) 침구의학의 전래
박영환 시중한의원장(서울시 종로구)
의서와 경혈도는 그림과 글자를 그대로 베껴서 옮기면 되기 때문에 필사를 하거나 목판으로 인쇄하는 방법을 통해 의학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출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인은 복제 할 수 있는 원형이 있어야 만들 수 있으며 경혈을 완전히 숙지한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야 정확하게 제작이 가능하다. 따라서 동인은 당시 그 나라의 침구의학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WHO/WPRO 표준경혈위치>나 ‘한국 표준 침구동인’의 경혈과 골도법을 <동의보감 침구편>이나 침금동인과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WHO/WPRO 표준경혈위치>는 조선시대 내의원에서 전해오던 침구의학의 명맥을 이어받았다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침구의학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수많은 의서를 약탈해 갔다. 1607년 이후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할 때에는 내의원의 양의(良醫)와 의원(醫員)도 동행하였는데 이들을 통해 침구의서가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다케다 쇼케이(竹田昌慶)가 1378년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것이 일본 최초의 동인이며 기슈번(紀州藩)의 번의(藩醫) 이와타 치유키(岩田道雪)가 이를 참조하여 1600년 간분동인(寛文銅人)을 제작하였다고 하여 일본의 동인이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직접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일본의 동인들에서는 중국 동인들의 고유한 특징을 찾을 수 없고 경혈의 위치도 중국의 동인과는 다르므로 일본이 중국에서 동인을 전래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현재 남아있는 일본의 동인들은 대부분 침금동인의 고유한 특징(머리를 크게 만들고, 쇄골과 늑골과 척추돌기를 강조하고, 팔다리의 근육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배를 볼록하게 하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자세)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조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한다.
일본에서 해부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해체신서(解体新書)>가 보급된 1774년 무렵인데, 서양해부학은 일본의 경혈도와 동인형의 제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일본에는 현재와 같이 서양인의 모습에 경혈을 표시한 경혈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혈도들은 당시 서양의학과 결합한 신문물이라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한국과 중국에 빠르게 보급되어 기존의 경혈도들을 점점 사라지게 하였다. 다음 시간에는 일본식 경혈의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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