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사제들과 항일운동한 변태우 한의사

기사입력 2022.09.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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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슬포금융조합 이끌어 일제강점기 생활경제 실천
    제주의생회 설립…고문 여독 및 옥중 후유증으로 별세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한의사들의 삶을 조명하고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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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제주도 서귀포 출신의 의사, 항일운동가인 변태우(邊太祐)는 제주도 내 천주교 사제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으며, 의사로서 인술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모슬포금융조합을 잘 이끌어 지역민들이 일제 강점기에 생활 경제를 실천하도록 계몽했던 항일운동가다.

    본관은 원주(原州)로 아버지는 변양근이다. 1899년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933번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이 제주읍 이도리 1429번지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천주교제주성당(현 제주중앙성당)의 신도가 됐다. 

    1922년 장한규의 둘째 딸과 결혼하고 1923년에 의생(醫生) 시험에 합격한 뒤 모슬포에 보창의원을 개업해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의생면허는 6920번, 한지의업면허 879이다. 그의 한의사로서의 기록은 동아일보 1923년 12월5일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치경, 장한규, 김홍기, 변태우 등이 제주의생회(濟州醫生會, 한의사회 전신)를 설립했다고 보도된 것이다. 

     

    생존방편으로 불가피하게 이와다(岩田富丞)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도 했던 그는 1932년부터 모슬포금융조합에 이사 등 임원으로 일하며 주민들의 경제적 권익보호에 기여하기도 했다.


    ◇탄압받은 천주교 신도들


    43세가 되던 1938년 가을 변태우는 제주도 제주읍 삼도리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천주교 신도가 돼 제주성당(남문통 소재)에 교적을 두었는데 1937년 일제의 의료법 시행령에 따라 한지의사(=지역 의사) 시험에 합격한 뒤로, 천주교 모슬포 지역 회장직을 역임하며 지냈다.  

    그해 가을 그는 당시 제주읍(濟州邑) 삼도리(三徒里)에 천주교 선교사로 와 있던 아일랜드 출신의 손신부(孫神父: 도슨 또는 다우스 파트리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일본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화 가운데는 모슬포 비행장의 넓이는 20만 평 정도이며, 남경 함락 당시에는 하루에 두 차례씩 한 번에 20기 정도가 바다 건너 폭격을 하기 위해 왕복 비행을 하였으나, 지금은 비행숫자도 많이 줄고, 군인 수도 많이 줄어서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1941년 10월 일본 경찰은 제주도 내의 반일 감정을 가진 세력들을 색출할 때 천주교 신도들의 모임 또한 탄압 대상으로 삼았었기, 때문에 몇 년 전에 손신부에게 말한 내용을 들어 그를 검거하였다. 당시 손신부는 일본의 패망을 바라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손신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것 자체가 군사기밀을 폭로한 것이라는 혐의를 두었다. 

     

    얼핏 보면 크게 문제가 안 될지 모를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한 인물을 탄압의 대상으로 몰아넣어 지독한 고문을 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 천주교 신자들의 항일 활동은 세 명의 천주교 신부가 주도하고 있었다. 손 신부, 서 신부(徐 신부: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 신부(羅 신부:Ryan, Thomas.D.) 이들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경우, 동양에서 천주교의 포교는 불가능해지고 서양인은 동양 각처에서 쫓겨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때 모슬포 군용 비행장의 모습과 내용이 외국 잡지에 사진과 함께 게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일본 군부에서는 군사기밀이 누설됐다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기밀을 누설한 사람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일본 군부는 먼저 서양 사람과, 조선인들을 의심했다. 당연히 모슬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우선으로 검속을 당했다. 

     

    1940년 일제는 제주도를 군사 기지로 만드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렇게 삶의 터전에서 죽음의 땅으로 변한 아픔의 장소가 제주에는 참 많다. 대표적인 게 알뜨르 비행장이다. 


    ◇제주 내 반일세력으로 색출돼


    일제가 제주도에서 중일전쟁과 남경지역 폭격을 준비하며 1930년대 중반까지 제주도 도민을 강제 동원해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고, 1940년대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탄약고, 연료고 등 중요 군사 시설을 감추기 위한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그것이 ‘셋알오름일제’와 서귀포시에 있는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 진지’이다.

     

    이러한 군사 기지화, 전초 기지화 작업을 하며 제주도도내 반일세력(항일세력)을 색출 및 제거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우선 적성국인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의 신도 조직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군사기밀을 누설했다고 해서 모슬포 공의로 종사 중이던 변태우는 1940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제 당국은 외국인 신부 3명과 평소 반일 감정이 있는 신도 35명을 구인해 심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외국인 신부 3명과 한국인 신도 10명이 기소됐고 그중 1명은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변태우는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국방보안법 및 군기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면서 변태우는 전라남도 광산군(光山郡) 대촌리의 보건소장으로 발령받아 생활 근거지를 광주로 옮겼다. 

     

    1948년 광주 시내에 ‘월산의원’을 개업하고 의술을 펼치다 고문의 여독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2년 뒤인 1950년에 광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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