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누기-37] 나의 연출가

기사입력 2024.10.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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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오래된 지하 카페다. 벽돌로 쌓은 실내 벽면이 세월을 견딘 힘을 보여주듯 버티고 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와 걸쭉한 목소리가 흐른다. 나는 연출가를 인터뷰한다.


     ―인간은 거짓말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쪽으로 진화를 해 왔대요. 연기는 사실은 거짓말이죠. 완벽하게 남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게 연기죠. 거기까지 가는 게 쉽지 않죠. 그런데 사람들은 연기한다고 하면 이상하게도 초보자든 오래된 배우든 무의식적으로 습득이 된 연기 형태를 가지고 와요.

    ―말하자면… ‘이게 연기야’라고 정형화된 연기요?

    ―네. 이미지적으로 왜곡된… 전업 배우들한테도 그게 꽤 오래가요. 10년 이상 가기도 해요. 그게 에고인데, 끊임없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죠, 용수철처럼. 

    ―그럼, 흔히 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 연기하지 않는 연기는 정말 고난이도겠네요?

    ―그게 굉장히 어렵죠. 단계가 계속 있는 거죠.

    ―시를 쓸 때도 시같이 쓰지 마, 그럴싸하게 쓰지 마, 그러는데 연기도 마찬가지군요.


    “설명하지마. 판단은 독자 몫이야”


    ―희곡을 쓰는 데도 문장을 잘난 척 꾸민다던지… 사실은 이면을 느껴지게 하는 거거든요. 연기에도 설명하지 말라는 얘기를 계속해요. 갖고 있으면 되지 감정을 왜 설명하려고 하나. 

    ―시도 그래요. 설명하지 마. 판단은 독자 몫이야.

    ―그런데 또 연기는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설명하게 나와요. 또 다른 자아가 계속 나와요.

    ―자기가 아닌 어떤 역(役)을 한다고 생각하면 더하겠네요. 설명하려고 하는 게.

    ―그렇죠. 거기에 눌리기도 하고. 그래서 수없이 많은 얘기를 하죠.

    그가 속한 극단은 이제 50년이 되었다. 1994년에 배우로 입단해서 활동하다 연출로 전향했다. 그는 1세대, 2세대 선배들의 뒤를 이어 ‘전업 1호’로 들어왔다고 했다. 

    ―배짱이요? 공명심 같은 게 있었어요. 나는 연극반 출신이니까 연극을 직업으로 선택할 거야! 이런 게 좀 있었죠. 보이기 위한. 어릴 때 뭐가 있었겠어요? 하하하.

    그가 통쾌하게 웃는다. 이만큼의 세월을 걸어온 사람이 꺼내 보일 수 있는 솔직함과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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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바로 연극이다!”


    ―이윤택 선생께 있을 때 독일에 공연하러 간 적이 있는데, <햄릿>의 레어티즈 역을 했어요. 오필리어 장례식에 오필리어 귀신이 나타나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죠. ‘오필리어, 이 무덤가에 오랑캐꽃이 피어났습니다.’ 이런 대사를 하다가, ‘무덤을 쌓아 올려라!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하고 울분을 터뜨리면, 무대에 진짜로 흙을 퍼부어요. 오필리어를 안고 있는데 사방에 흙먼지가 날리고… 연출의 요구가 ‘절대 눈을 감지 말라’였어요. 하하하.


     그때 햄릿이 ‘오필리어!’ 외치면서 와요. 그럼 내가 칼을 뽑아서 ‘이 찢어 죽일 놈!’하고 달려들어 찔러야 하는데, 있어야 할 칼이 없는 거야. 무대 밑에 대고 ‘칼, 칼!’ 하는데 스탭들이 못 들어. 그 순간 무덤지기가 들고 있는 삽이 눈에 띄었어요. 그 삽을 뺏어서 찔렀죠. 뒤늦게 스텝들이 칼을 찾은 거야. 누워 있는 오필리어가 ‘칼 찾았어, 칼 찾았어!’ 그래서 어떡해. 한 손은 삽으로 막으면서, 칼을 받아서 찔러 죽였죠. 끝나고 나서 연출한테 엄청 혼나겠다 싶었는데, 이윤택 선생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야. ‘이게 바로 연극이다! 살아있는!’ 하하하. 뒷날 베를린 신문에 기사가 났어요. ‘너무나 훌륭한 무대였다. 칼과 총과 농기구를 이용한!’. 


    그가 신명이 나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아는 그는 극단의 연출가인데, 그는 이미 오랜 경력을 쌓은 배우였다.

    ―무대공포증에 걸렸어요. 알고 봤더니 내 안에 문제가 있었어요. 욕심이 많았던 거지. 배우를 하고 싶은 욕망은 있고, 극단은 운영과 연출을 원하고… 결국 일이 너무 많으니까 배우를 놔야겠다 싶었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시야가 넓어졌어요. 배우를 하고 싶은 욕심은 항상 있죠. 근데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연습하는 우리 배우들을 보면서, 내가 연기를 하면 지금 쟤들만큼 할 수 있을까? 


    “그는 ‘평생 연극쟁이’다”


    그는 서른여섯에 ‘극단의 원리’라는 것을 정했다. ‘극단현장의 단원들은 무대 위에서의 깨달음을 일상으로 가져가고, 일상에서의 경험을 무대 위로 가져가는 순환을 통해서 자아를 완성해 나가고, 그걸 바탕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계획서를 쓸 때마다 그걸 쓴다. 그는 사람 사이는 소리를 나눠야 한다고 했다. 무대에서도, 무대 위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일상에서도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연습할 때요. OO이가 정확하게 타이밍을 잡고 들어올 때 나도 웃음이 나거든. 내 역할이란 건 싫어도 끊임없이 얘기하는 거예요. ‘너 안다고 하는데 모르는 것 같아.’ 같은 얘기를 십 년 이상 반복해요. 하하하하. 


     이 행복한 연출가가 나의 삶에 지금처럼 깊게 연루될 줄 몰랐던 그때, 벌써 5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나는 긴 시간을 들여 그의 배우 인생, 연출 인생을 묻고 듣는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묵직하고 단단하다. 스스로 말하듯이 그는 ‘평생 연극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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