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예방백신 접종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나긴 코로나 감염병과의 동거도 이제 머지않아 끝자락이 보일듯하다. 질병관리청에서 70~8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먼저 접종케 하도록 우선순위를 정해 나이가 많을수록 접종비율이 높은데, 오랫동안 장유(長幼)를 따지는 유교 전통의 예법에 익숙해서인지 그 어느 누구도 이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서구사회나 문화가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똑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지는 알지 못하나 날마다 감염에 대한 우려와 공포심을 이겨내야 하는 처지에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미풍양속을 지킨다는 점에 은근히 자긍심마저 느끼게 된다.
매천 황현, 56세에 자결하며 絶命詩 남겨
세계적인 대유행을 맞아 부랴부랴 개발된 백신들을 긴급사용 허가된 터인지라 위험을 무릎 쓰고 주사를 맞기에 주저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초·중교 이후로 몇 십 년 동안 예방접종을 받아본 지도 까마득한데, 어느덧 해당자가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걱정스런 마음을 달래주려는 지인들이, 접종 후 사망사례가 늘고 있다며, 유서를 써 놓았냐며 농담을 건넨다. 백세시대라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인생사요, 환갑을 넘긴 뒤로는 여생(餘生)이라 불렀던 것을 상기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다.
딱히 무엇을 남겨야 할지도 막연하지만, 정신없이 살다가 어이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해서 옛적 선인 가운데 죽음을 미리 직시한 분들은 어떤 말을 남겼나 궁금해 졌다.
대한제국기 우국지사이자 문장가였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45~1910)은 1910년 7월 한일합병 소식을 전해 듣고서 망해가는 나라에서 글 배운 지식인으로서 자괴감을 달랠 길 없어 56세의 나이로 자결을 결행하였다.
그는 목숨을 끊기에 앞서 4편의 절절한 유작시를 절명시(絶命詩)란 제목으로 남겼다. 망해가는 고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선비로서 비루하게만 느껴지는 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 무진 애썼던 듯하다.
“난리 통에 휩쓸려 다니며 백발이 다 되도록, 목숨을 버리려다 멈춘 적 그 몇 번이던가(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그 가운데 한귀는 하도 절창이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가을밤 등불 아래 책을 덮고서 천고의 옛일을 마음속에 새겨보니, 인간으로 태어나 배운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도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다산 정약용, 회갑 즈음에 自撰墓誌銘 남겨
몇 해 전 남도답사 길에 우연히 마주친 『매천시집』은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전남고흥 사는 박형득이 펴낸 책인데, 보성벌교의 박수용상점에서 1933년에 발행한 지방판이다. 편집자는 발문에서 “간절하게 선생의 풍모를 사모한 나머지 금품을 모아(연금·捐金) 전에 간행한 판본에 시 수십 편을 덧붙여 널리 펴내서 사해동지(四海同志)들과 더불어 나누어 보고 다시 선생의 시문을 염송하고자….”라고 발행취지를 밝혔다.
또한 같은 글에서 불후의 명작에 배인 선생의 재주를 옮겨 전할 뿐만 아니라 천년에 드리울 절의를 지켜 사표(師表)가 되신 선생을 우러르고자 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 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온 다음, 회갑을 맞이하던 때를 즈음해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써서 남겼다.
아마도 살아서 생전에 파란만장했던 일평생을 자신의 손으로 오롯이 정리하고 싶으셨나 보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인품과 공로를 글로 새기어 후세에 영원히 전한다는 뜻에서 짓는 글이다. 보통 정방형의 돌 한편에 성씨와 고향, 관력(官歷) 등을 기록하고 다른 한편에는 망자를 칭송하는 시문을 새겨 무덤 속에 넣어준다.
다산이 직접 지은 자신의 묘지명,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란 뜻에서 지었다. 어려서 영특해 문자를 알았고, 10세 때부터 과예(科藝)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집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 (중략) ….”
젊은 선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의 급서(急逝)로 정세가 급변하자, 1801년 서학을 숭상했다는 빌미로 맏형인 정약종은 사사(賜死)되고, 중형인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 땅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은 장향(瘴鄕)으로 알려졌던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저술했고 떠나오기 직전, 평소 뒷일을 돌봐주던 아전을 위해 『촌병혹치(村病或治)』란 간략한 구급방서를 적어 주기도 했다.
뒤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 읍내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지내다가 1808년 다산초당을 짓고 이거한 뒤에야 비로소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그의 대표 저작들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라 전한다. 그는 또한 오늘날 전염병백신의 원조격인 종두법에 대해 자세히 연구한 의학자로 종두전문서 『종두요지(種痘要旨)』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당대에 인정받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 천명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하였으며,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의 아호 가운데 하나인 사암(俟菴)에는 당대 인식에 대한 비관과 후세에 대한 절절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동의수세보원』의 원고를 쉼 없이 수정하고 있던 동무 이제마의 치열한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게 되며, 그 역시 자신이 이룩한 사상의학이 백년 뒤에나 빛을 보게 되리라고 예측하였다.
죽음이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면?
70~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최인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책상머리에 염분이 엉길 정도로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이 주신 재주를 발휘하여 글쓰기를 지속하였다. 시인 이상은 폐결핵으로 선혈을 토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냉정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애썼으며, 천상병은 죽음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라며, 동심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이 풍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걸레스님 중광은 한바탕 잘 놀다간다며 허허허 큰소리로 웃음을 주고 떠나갔다.
죽음이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면, 아니 마치고 싶지 않다면, 다음 생이 아니라 죽음 다음의 일을 대비하는 것이 또 다른 삶의 연장이지 아닐까 싶다. 자신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동분서주하며 지내다가 예기치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삶이 좌절되거나 죽음과 맞닥트려야 한다면 이 또한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호국의 달 6월, 지루하게 이어지는 방역 상황 덕분에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망외의 보람을 거둘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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