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 학술연구교수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자주 인용되어 워낙 유명한 정의이지만,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감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로 정의한다.
따라서 완전한 안녕 상태와 질병 사이에는 일련의 연속선이 그어질 수 있고, 그 중간 어딘가에 ‘미병(未病)’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미병이란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서부터 사용된 용어로, 『내경』에는 ‘불치이병 치미병(不治已病 治未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고 『난경』에서도 ’상공치미병 중공치이병(上工治未病 中工治已病)’이라고 하여 병이 되기 전에 치료하는 것이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료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한의학 전통을 바탕으로, 한의계는 그동안 한의약의 예방의학적 강점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미병 상태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미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제화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특정 대상의 미병상태를 측정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동안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는 미병연구단을 구축하여 미병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해왔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 중 하나로서, ‘미병 설문지’가 개발되었다. 그런데 미병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구성된 미병 설문지의 항목이 흥미롭다. 미병 설문지란, 피로, 통증, 소화장애, 수면장애, 우울, 분노, 불안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세부 영역은 다시 증상의 정도, 증상 지속 기간, 증상으로 인한 불편정도, 휴식 후 회복정도를 평가하는 문항으로 구성된다 (별첨 참조).
의미있는 것은 미병(未病)의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7가지 증상 중에 우울, 분노, 불안이라는 3가지가 부정 정서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건강 상태가 흐트러질 때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괴로움 중에 큰 부분이 바로 정서적 문제들이다. 한의학에서 미병의 관리에 강점이 있고, 그것이 더욱 바람직한 방법이라면 한의학정신건강센터에서 한국인의 정신건강을 연구할 때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서부터 미병 상태라 할 수 있는 부정적 정서, 그리고 질병인 정신장애까지 모두 다 관리하는 모델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반응-증상-질병의 스펙트럼
한의학정신건강센터에서는 질병 중심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환자 중심, 인간 중심의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정신건강을 관리함에 있어서도 범주적 구분에서 벗어나 “스펙트럼 장애”로 정신을 바라본다. 이때의 스펙트럼이란 반응-증상-질병의 연속성을 띠고 있다.
‘반응’이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이고 생리적인 작용이다. 어두운 숲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누구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머리가 쭈뼛 서고 오금이 저리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반응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타나는 결과이다.
반면, ‘증상’은 부적응적인 결과들이 포함된다. 불안이 증상화되면, 그때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과도한 반응들이 튀어나온다. 학교에서 과제 발표를 앞두고 순서를 기다리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아득해지고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국 도중에 교실을 뛰쳐나오는 것. 이런 결과들은 사람을 점차 고통으로 빠뜨린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질병’이 되면 그때는 자극의 유무와 상관없이 증상이 지속된다. 늘 막연한 걱정과 염려가 자신을 따라다니고, 기분이 저하되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감정조절이 안 되어 까닭도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면 그때는 ‘병’이 자신의 삶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위험신호로 보아야 한다.
신체와 정신이 만날 때
그 반응에서부터 증상-질병에 이르기까지, 한의학은 신체와 정신적 문제를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1990년에 문화정신의학 분야 저널에 “화난 간(肝), 불안한 심(心), 우울한 비(脾)”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린 적이 있다. 심신일여(心身一如)를 매우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간-관련 변증은 분노와 연관된 일련의 증후군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평소에 어떤 신체 증상을 경험하는지를 확인하면 우리는 상대의 마음도 헤아려볼 수 있다.
늘 가슴이 답답하고 목과 명치가 막힌 것 같으며 얼굴과 가슴에 열감이 느껴진다고 호소하는 환자가 온다면, 한의사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원적 본체인 사람은 형신일체(刑神一體), 즉 정신과 신체가 일기(一氣)로 변화하며 신정기혈(神精氣血)로 발현한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한의학정신건강센터에서는 마음과 정신을 이해하고 관리하기 위해 정신과 환자들이 겪는 신체 증상과 정신 증상을 잘 연계하여 심리평가도구 안에 녹여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의사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 몸을 보아야 할 때도 있고, 몸을 잘 알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야 할 때도 있다. 한의학정신건강센터에서 개발한 심리평가도구가 한의사의 진료에 가장 한의학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장은수, 윤지현, 이영섭. 증상 정도, 기간, 불편정도 및 회복력 기반 미병 설문지의 신뢰도 및 구성 타당도 평가. 대한한의진단학회지.2017;21(1):13-25.
2) Ots T. The angry liver, the anxious heart and the melancholy spleen. Culture, medicine and psychiatry. 1990;14(1):21-58.
3) Kwon CY, Kim JW, Chung SY. Liver-associated patterns as anger syndromes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a preliminary literature review with theoretical framework based on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standards of terminologies and pattern diagnosis standards. European Journal of Integrative Medicine. 2020:10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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