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일제강점기인 1936년 구황실 전의장(典醫長)을 지낸 서병효(徐丙孝, 1858~1939)가 자신의 진료소인 동남약방(潼南藥房)에서 펴낸 『경험고방요초(經驗古方要抄)』, 이 책은 정조때 수의(首醫)를 지낸 강명길(康命吉, 1737~1801)이 왕실에서 펴낸 『제중신편(濟衆新編)』을 토대로 저자인 서병효의 임상경험을 가미하여 지은 온전한 의약방서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저자 서문과 함께 한국화단에서 서양화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의 글이 첫 머리에 붙어있다.
서문을 쓴 동우(東愚) 김관호(金觀鎬, 1890~ 1959)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이름난 고희동(高羲東)과 함께 초창기 서양화단에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평양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09년(융희3)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11년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1916년 일본 문부성에서 주최한 제10회 미술전람회에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해질녘[夕陽]’이 특선으로 입선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이끌었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누드화여서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김관호 서양화가, 『經驗古方要抄』 서문 저술
그는 또한 1916년 12월 평양 일대의 풍경을 다룬 작품 약 50여 점을 선보이며, 처음 개인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유화 개인전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상 최초의 개인전 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이후 1920년대에 각종 공모전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최초의 종합문예동인지인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문예지 『영대(靈臺)』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회화와 문필을 겸비하였다.
그러던 그가 1927년 무렵부터는 활동을 중단하고 평양에 머물며 문예와 화단에서 모두 물러났다. 때문에 그가 어떤 계기로 서병효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미 의료계와 서양화단에서 유명인사로 통하던 두 사람의 만남은 특별해 보인다.
이상하게도 이 무렵 서병효도 교육과 단체 활동이 뜸해지면서 서울 운니동에서 개인의원을 개원하고 진료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서문은 1931년에 작성된 것이지만 김관호의 서문은 1936년 발행 당시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나의 벗 ‘侍郞’, 전의장으로 봉직한 서병효 지칭
김관호는 서문에서 여러모로 그의 인품과 학문적인 열성을 찬양했지만, 무엇보다도 장중경 상한치법과 『의학입문』의 상한치료법에 장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나아가 국왕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유명을 남길 때에도 여러 번 편작과 같은 신기한 효험을 보였기에 포상을 받아 돌아왔다는 말도 특기하였다. 이로 보아 저자와 김관호는 매우 가까운 처지에서 평소 서로의 일상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서문에서 저자를 ‘나의 벗 시랑(余友侍郞)’이라고 적어 매우 친근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서병효를 ‘시랑(侍郞)’이라고 지칭한 것은 아마도 서병효가 구황실의 시종원에 속한 전의장으로서 봉직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리라. 하지만 1858년생인 서병효와 1890년생인 화가 김관호, 두 사람의 나이가 30여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벗으로 부르며 통교(通交)할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관련 기록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30년대 이후 화단활동을 접어버린 김관호의 기록은 상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또 하나 학창시절부터 젊은 나이에 촉망받는 서양화가로 활동했던 김관호의 작품 가운데 말년 작은 서예작품만 전한다. 서양화를 도입한 사람과 전통 서예작품을 남긴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문의했으나 대답이 확실하지 않다.
어찌된 일인지 막연하던 중, 서병효에 대한 논문(박훈평, 서병효 연구에 대한 예비적 고찰, 2020.)을 읽어보니 이 책의 서문을 쓴 동우 김관호는 대한제국의 궁내부 사무관 등의 관직을 지내며 저자와 친교를 맺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무관출신이었으나 1907년 이후 궁내부에 근무한 이력이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서병효·김관호, 근대 한의학 교육과
한국서양화 개척에 앞장 선 선구자
관력이나 연배로 보아서는 가장 근사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호로 적힌 ‘東愚’가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관원이력서에는 아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미술사학에서는 서양화가로 알려진 김관호의 호가 동우이며, 말년의 서예작품 또한 그의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어느 쪽이던 어디선가 잘못된 정보가 눌러 붙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한일합병에 이어 일제총독부 통치가 강화되면서 대외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기에 관련 자료가 미비하게 된 탓으로 보인다.
1999년 평양 문화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행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따르면, 김관호는 거족적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항거하는 표시로 붓대를 꺾어버리고 미술창작을 단념하였고 후계 육성만을 지속하였다고 전한다.
서병효는 순흥군 서기로 일하던 아들 서정린(徐廷麟, 1876~1911)이 한일합방이 되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되자 영주의 뒤새에 귀운정을 마련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권피탈 이후에도 끝까지 고종과 순종의 건강을 돌보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서병효와 김관호, 근대 한의학 교육과 한국서양화 개척에 앞장 선 두 사람의 선구자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그 족적이 확연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며, 우리가 풀어가야 할 근대사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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