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憲泳(1900-1988)의 醫學思想(7-完)

기사입력 2019.11.1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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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 사회 그리고 大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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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유상 교수 경희대학교 원전학교실

     

    의학은 실용학문으로서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환자의 질병을 고치고 무병장수를 위하여 미리 질병을 예방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의사도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자신의 맡은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 그런데 의사 가운데도 큰 의사 즉, 大醫가 있는데 사람의 병을 크게 고치는 의사를 말한다. 여기서 크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병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결국에는 자신 스스로와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온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병의 원인이 되며,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여 질병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 사회가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때 우리의 건강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大醫는 단순히 많은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서 그에 대처하는 의사라 할 수 있다.  

    趙憲泳의 집안은 조선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趙光祖의 후손으로서 경북 英陽의 주실마을에 정착하였는데, 정치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지는 못하였으나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趙憲泳은 일본으로 유학하기 전부터 영양청년회 활동을 하였으며 동경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에는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1년 新幹會 해산 이후 1932년 朝鮮理療會 창립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문과를 졸업한 직후인 1927년에는 新幹會 동경지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고 이듬해 귀국하여 新幹會 본부의 총무이사로 활동하였다. 趙憲泳은 당시 조선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일어난 일본인 선주와 조선인 어민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국민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강원, 안동, 김천 등지에 순화강연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趙憲泳은 1928년 朝鮮敎育協會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31년 新幹會 해산 이후에는 자신의 계몽운동을 의학 분야로 돌려서 1932년에 朝鮮理療會를 창립하게 된다. 

    여기서 理療라는 것은 鍼灸 및 약물을 포함하는 자극을 통한 치료를 통칭하는 것으로 그가 주창해온 民衆醫術를 대신하는 개념이었다. 

    이와 같은 의료 계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朝鮮理療會에 참여한 인사들은 한의계에 속하지 않은 李光洙, 曹晩植, 俞鎭泰 등 新幹會와 朝鮮語學會 활동을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1935년에는 朝鮮語學會의 활동을 하면서 「한글」에 「小異를 버리고 한글 統一案을 支持하자」는 기고를 하였으며, 같은 해 朝鮮語 표준어 査定委員會 讀會에 위원으로 참여하여 표준안 수정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33년경 東洋醫藥社를 설립하고 1934년 10월 東西醫學硏究會 총회에서 간사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으로 한의계에 투신한 이후에는 한의학을 통하여 활발한 사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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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영

    1948년 민족진영 단일 후보로 제헌국회의원 당선 

     

    1945년 광복 이후로는 한의계 활동보다는 주로 정치 활동에 전념하였는데, 같은 해 8월 원세훈, 조병옥 등과 조선민족당을 설립하였고, 9월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곧이어 창당한 한국민주당에서는 지방부 부장, 연락부장,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비상국민회의 후생위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중앙집행위원 등도 맡아서 민족주의 노선의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8년 5월에 마침내 민족진영 단일 후보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再建」창간호에 「嶺南騷擾의 眞相·原因·對策」를 발표하고 이어서 제2, 3호에 각각 「國立서울大學校案과 學生盟休에 對하여」, 「右翼陣營의 行動統一을 强調함」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趙憲泳은 제헌국회 활동 기간 동안 국회의원 중에서 368회로 가장 발언을 많이 한 의원이었으며, 헌법제정을 위한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 헌법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1948년 경향신문에 「國際聯合과 韓國獨立-大西洋憲章의 精神을 想起하라」, 1949년에 「美國撤退와 國內輿論」(새한민보), 「얄타協定과 極東暗雲」(民聲), 「北大西洋同盟과 太平洋同盟」(新天地), 「和戰 兩樣의 態勢」(서울신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납북되기 직전에도 「歸屬財産은 어떻게 處理되나」(民聲), 「現政府에 對한 나의 要望」(新天地), 「國內政界의 回顧와 展望」(民族文化), 「民族的 重大危機」(東亞日報) 등을 기고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활발히 개진하였다. 

    헌법과 정치제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1948년에 「憲法制定에 臨한 私案」(京鄕新聞), 「大韓民國憲法論」(海東公論), 1949년에 「國會와 政府」(國會報) 등을 발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945년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부터는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으며, 이후 1950년초에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무소속으로 활동한 이유는 정당 중심의 지나친 정치적 분쟁이 격화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한 개인의 국회의원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때문이며, 1950년 3월에는 16명의 무소속 국회의원 공동으로 양심과 자유를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견제하는 담화를 발표하자 국회본회의에서 이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의 노선과 거리가 멀어진 후에는 우익 진영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으며, 1949년 6월에는 오히려 좌익 폭도들의 피습을 받아 경북 英陽의 본가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하고 개선해 나가

     

    趙憲泳이 납북되기 전에 발표한 마지막 글인 「民族的 重大危機」를 보면, 국민의 정신적 병폐가 심하여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염려될 정도라고 우려하면서 이것은 우리 민족성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수 백년 동안의 붕당 싸움으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할 줄 모르는 몹쓸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정한 예산집행을 통하여 적자재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선거를 연장하지 말고 바로 시행하며, 마지막으로 국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치를 하여 국회의원이 된다든지, 행정부에 들어가 고위 공무원이 된다든지 하는 것만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이 바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다. 

    의학을 하면서 겸하여 정치나 여러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에 앞서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한다. 趙憲泳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단지 한의학과 정치의 활동을 병행하였기 때문에 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는 안목과 실천의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大醫는 질병이 생기는 근본 원인을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문제 속에서 찾아내어 크게 치료하는 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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