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憲泳(1900-1988)의 생애(3)

기사입력 2019.08.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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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憲泳의 해방 前 저술과 기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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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유상 교수 
    경희대학교 원전학교실

    趙憲泳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의계 외에도 朝鮮語學會의 활동도 하였는데, 1935년 8월에는 조선어표준어 査定委員會 第二讀會에 경상도 대표로 참여하여 修正委員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42년경까지 추진된 『조선어대사전(우리말큰사전)』 편찬에서 한의학 전문 주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4년에 조선중앙일보에 「한글統一案의 批判과 修正」(朝鮮中央日報 10월)이라는 글을 연재하였으며, 1935년 6월에도 朝鮮語學會의 『한글』에 「小異를버리고 한글統一案을 支持하자」를 기고하였고, 1938년에는 東亞日報에 「말은 思想卽生活이다 語彙를 琢磨하라」(東亞日報 1938년 1월)를 기고하였다. 그밖에 趙憲泳은 1928년에 朝鮮敎育協會의 평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茶山 丁若鏞의 의학에 대하여 1935년 1월 『新朝鮮』에 「醫學上으로 본 茶山先生」이란 글을 기고하였고, 다시 동년 7월 朝鮮日報에 「漢醫學上으로 본 茶山醫學의 特色」으로 기고하였으며, 이는 동년 8월 朝鮮通信에 「漢醫學より見た茶山醫學の特色」으로 게재되었다. 또한 의사들이 만든 대중잡지인 『大衆醫學』 4월호에 집필진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東洋醫藥』 발행, 전국 각지서 漢醫學 특강

    그밖에 趙憲泳 자신이 쓴 수필로는 「戀愛·結婚·新婚」(『新東亞』 1936년 7월), 「公開못하는 어제 낮 꿈」(東亞日報 1938년 7월), 「나와 讀書」(『春秋』 1942년 9월) 등이 있다. 

    趙憲泳은 1935년 『東洋醫藥』을 발행하면서 동시에 전국 각지의 講習會에 金永勳과 함께 참석하여 漢醫學 특강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東洋醫藥』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동년 1월 동안 全州通俗漢醫學講話, 忠南醫生講習會, 忠南藥種商講習會 등에서 강연을 하였다. 또한 동년 5월 26일에는 朝鮮漢藥業組合 정기총회에서 의학강연을 하였고 12월 19일부터는 咸南醫生講習會를 개최하여 강연하였다. 

    1936년 4월 2일에는 元山醫藥組合 후원 元山基督靑年會 개최 東西醫藥講座에서 강연하였으며, 동년 4월 18일에는 通俗漢醫學講演會를 개최하여 「漢方醫學에서 본 現代病」을 강연하였고 이는 계속 이어져 1939년 11월 1일에도 通俗漢醫學講座가 개최되었다. 

    1939년 2월 2일~7일에는 全州에서 개최된 漢醫藥講習會에서 강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연의 인기에 힘입어 1936년에는 鄭殷采가 趙憲泳을 초빙하여 대전에 大成醫學講習所를 설치하여 5월에 입학식을 하였는데 이후 시설 및 교육체계 미비로 趙憲泳이 퇴직하자 7월에 학생 분규가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현장의 강연회 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한의학 내용을 강연하였는데 1942년에 간행된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에는 1940년 2월 21일과 22일에 방송강연을 한 「科學的으로 본 漢方醫學」의 내용이 실려 있으며, 같은 해 3월 22일에 「先哲의 養生訓」을 방송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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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洋醫藥社 설립해 『民衆醫術理療法』 등 출간

    趙憲泳의 저서를 살펴보면, 朝鮮日報 지면상의 한의학 부흥 논쟁이 마무리 된 1934년 12월에 자신의 대표 저작인 『(應用自在)通俗漢醫學原論』을 출간하였고, 언론 및 잡지에 발표된 글 가운데 한의학 임상에 필요한 내용을 모아서 『民衆醫術理療法』(1935년),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1937년),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1938년),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1939년),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1941년) 등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특히 이들 5종의 서적은 해방 후 1955년에 杏林書院에서 한정판으로 각각 重刊되었다가 1963년에 합본으로 묶여서 『東洋醫學叢書 : 五種』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1937년에는 자신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物質文明은 어데로』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1942년에는 朴季祚가 1930년대 중반 이후 한의학 부흥 논쟁 관련 논설들을 모아서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을 간행하였다.

    趙憲泳은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고 나서 1932년 金永勳을 만난 이후부터 대략 1934년까지의 시기에 서울 낙원동에 東洋醫藥社를 설립하여 『(應用自在)通俗漢醫學原論』, 『民衆醫術理療法』 등을 출간하였다. 이후 東洋醫藥社는 관훈동으로 옮겨져서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을 출간하였고, 다시 명륜동을 옮긴 이후에는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 등을 출간하였다.

    1936년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日月書房은 팔판동(또는 인사동)에 위치하였고 대표는 趙憲泳의 차남으로 청록파 시인인 趙芝薰(본명은 東卓)이었는데, 이곳에서 『物質文明은 어데로』가 출간되었다. 그밖에 東洋醫藥社에서 『傷寒新論』, 『良方集解』, 『東醫診斷學』 등을 당시 출간 예정이었으나 실제 출간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趙憲泳의 한의계 내 행적에 대하여, 당시 주요 기관인 京畿道醫生會와 京畿道醫生講習所 등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일부 학계에서 추정하였고, 또한 그 이유에 대하여 1940년대 한의계의 어용화 경향 속에서 趙憲泳이 어용화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한의계의 어용화 경향은 아직 정설로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때 일반 민중에게 한의학 소개 보급

    당시 京畿道醫生會가 日本 東洋醫道會와 협력한 것은 總督府로부터 東洋醫藥專門學校 인가를 받기 위한 것이었으며, 道衛生局과 교섭하여 약재 배급의 권리를 받아낸 것도 협회의 어려운 재정 상태를 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므로 한의계의 어용화 경향은 아직 학술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趙憲泳은 단지 한의계 공식 기관에서 활동하지 않았을 뿐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 임상진료를 지속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정리하여 대중 매체와 잡지 등에 계속 발표하였다. 한의계 공식 기관에서 활동한 것은 1934년 10월 東西醫學硏究會가 개편된 때의 짧은 기간 동안 뿐이었다. 

    단, 해방이 가까워 오면서 국내외 사정에 의하여 본래의 정치 활동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으며, 실제 해방 직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전념하였으므로 이후 한의계 내의 공식적인 활동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晴崗 金永勳선생의 회고록에는 趙憲泳의 本心이 정계로 복귀하는 데에 있었다고 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것에 뜻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趙憲泳은 1930년대 초에 한의계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약 10여년 동안 매우 활발하게 저술, 기고 및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의학을 일반 민중들에게 소개하고 보급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시기의 고달픈 삶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계몽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어려운 한의학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한의학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 활동, 조선교육협회 활동 등을 병행한 배경에도 역시 민중을 계몽하고자 한 생각이 깔려있었다. 趙憲泳의 이러한 사상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이후 지면을 통하여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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