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10

기사입력 2019.03.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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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시대 동인형(銅人形)에 드러난 조선 침구학의 족적
    안상우 박사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임진왜란 때 수많은 의서 약탈 의학문화 흥성
    에도시대 동인형들 조선 침금동인과 아주 유사
    조선 침구학, 日 침구경혈학 발전 결정적 기여


    전통시대 경락과 경혈을 기록하고 학습하는 방법으로 돌이나 청동, 나무, 종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인체모형을 제작하여 표시하는 방법과 종이나 돌비석과 같이 평면에 선형으로 그림을 그려 남기는 방법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렇게 표시한 그림을 경락도, 경혈도 혹은 침구도라고 부르는데, 고대에는 이를 천자가 거처하는 명당에 비유하여 ‘명당도(明堂圖)’라고 불렀다. 혹은 청동으로 사람의 형상을 주조하여 만든 동인(銅人)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여 ‘동인도(銅人圖)’, ‘동인명당도(銅人明堂圖)’라고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경혈과 경락을 별개로 표시하다가 송대 『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가 나온 이후로 경혈도와 경락도를 하나의 그림에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경혈의 위치와 경맥의 유주를 동인형에 새겨 넣었다.

    예를 들어 중국국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침구동인은 경혈만 표시한 동인이며, 우리나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침금동인(鍼金銅人)은 경혈과 경맥 유주를 함께 표시한 대표적인 동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국립동경과학관, 하리큐뮤지움(鍼灸博物館)에 소장된 여러 종의 동인형(銅人形)은 모두 경락과 경혈을 함께 표시한 것들이다.


    일본의 의학은 서기 420년 백제에서 덕래(德來)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후손들이 대대로 나니와(難波)에 거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활자와 수많은 의서를 약탈해 가서 갑자기 의학문화가 흥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에 동행한 양의(良醫)와 의관을 통해 조일(朝日)간 의학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허임(許任)의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이 1725년, 1778년 2차례나 간행되면서 일본의 침구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동인에는 조선에서 전해진 침구학으로부터 많을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근래 입수한 3구의 에도시대 동인형의 외형과 골도(骨度)를 측정하고 그 특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침구학이 일본의 동인 제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이 자리를 통해 그 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 내용은 최근 경락경혈학회지에 발표된 논고에 바탕을 둔 것으로 공저자인 시중한의원 박영환 원장의 치밀한 조사와 노력 끝에 이루어진 성과이다.
    논문의 주안점을 이루는 여러 가지 변별점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동인형의 자세와 위양혈의 위치이다. 우선 조선 동인 제작법이 일본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니, 이들 에도시대 동인형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의 침금동인과 아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머리와 몸통의 비율인데, 실제 골도법보다 두상을 30% 정도 크게 제작하고 대신 목을 짧게 하여 전체적인 비율을 맞춘 점. 둘째, 늑골과 쇄골, 척추돌기를 크게 강조하고 흉부에 비해 복부를 볼록하게 만든 점. 셋째, 성별을 표시하지 않은 점. 넷째, 두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내밀고 있으며, 무릎을 약간 구부린 자세로 서 있는 것이 흡사하다. 마지막으로 표면에 근육과 뼈, 인대 등을 나타내어 경혈의 위치를 표시한 점에서 유사성이 크다. 현존 중국의 동인 중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경우는 단 한 가지도 없다.
    이러한 조선적 특징에 반해 중국의 동인들은 머리의 비율을 골도법(骨度法)에 맞추고 목을 길게 만들었으며, 대체로 머리에 작은 관(小冠)을 쓰고 있다. 또 흉배의 늑골과 척추돌기를 강조하지 않아 흉곽이 밋밋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울러 사지의 인대와 뼈, 근육도 표시하지 않고 복부도 볼록하지 않다. 특히 중국의 동인은 음경을 표시하여 성별을 구분한 것이 특징인데, 천이나 청동으로 띠를 만들어 음경을 가린 경우도 있다. 한편 자세에 있어서도 두 손바닥을 펴서 몸통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많으며, 한손은 손바닥을 앞으로 다른 한손은 뒤로 하고 있거나, 한 손을 위로 올린 경우도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조선 것과는 자세가 다르다.
    다음 위양혈(委陽穴)의 위치 표기가 쟁점이 되는데, 알다시피 위양혈은 그간 혈위가 잘못 알려져 온 대표적인 경우이다. 많은 의서에서 위양혈은 ‘승부혈(承扶穴) 아래 6치’로 잘못 기재되어 전해져 왔으며, 『십사경발휘』, 『침구자생경』, 『류경도익』, 『의종금감』 등에서 모두 오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제 동인형에도 모두 위양혈이 은문혈(殷門穴) 옆에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오류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한 책은 다름 아닌 바로 세계유산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허준은 위양혈의 혈위가 본래 ‘在承扶下一尺六寸’인데 본문에서 ‘一尺’ 2자가 누락되면서 은문혈과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현대침구학자인 황룡상의 견해에 따르면 현재 알려진 동인 중에 위양혈의 혈위를 정확하게 제대로 표시한 동인은 조선의 침금동인이 유일하다고 한다. 적어도 17~18세기 조선에서는 중국과는 다르게 위양혈의 혈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과 중국 침구학의 차별점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가늠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위양혈의 잘못된 위치를 바로잡아 인지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신문(神門), 합곡(合谷)혈에 대해서도 허임이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와혈(訛穴)에서 잘못된 위치를 바로잡은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위양혈의 위치가 잘못된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의종금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오류가 확대 재생산되었다. 17세기 조선은 이미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침구학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일본 침구경혈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밝혀주는 증거가 이 오래 된 동인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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