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자생한방병원 수련의 김진현
나와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
M&L 실습을 마치고 정신과 치료란 무엇인가, 마음의 방을 치료자와 같이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봤을 때 다음 3가지로 정리되었다.
- 내담자가 성장해 나가기 위한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
- 그 과정이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옆에 있어준다는 것
-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같이 봐 줌으로써 새로운 시각으로 기존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이번 실습에서 너무나 많은 분들이 사랑으로 함께 있어주었고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을 재발견하게 해주어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실습의 중심 테마는 단연코 “엄마”였다. 우리나라의 엄마와 딸의 관계가 특히 그러하듯이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증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도 너무 얕다.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해 떠올릴 때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라며 식상한 면접 답변에나 어울릴 만한 어구를 생각했다. 거짓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이 어구를 떠올릴 때면 마음 한 구석에서 내면의 역동이 일렁였다.
또다시 찾게 된 M&L
작년에 이어 올해도 M&L 강의를 찾게 된 건 엄마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한방신경정신과 수련의로서 제법 부족하다고 느껴서 그 부분을 채우고자 선택한 것이다. 상담치료를 많이 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으로 치료가 잘 진행되지 않은 케이스가 나오자 실패 원인에 대해서 열심히 분석했다. 라포를 쌓기에 loving이 부족했을까, 너무 많은 스킬들을 짧은 시간 안에 시도해서였을까, 너무 친구 같은 느낌으로 상담을 진행했나. 가능성 있는 실패 원인은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내 탓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은 떨어졌다.
여름날 어드밴스드 코스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건들에 중심이 흔들려서 정신을 좀 빼놓고 살았다. 중심이 흔들리자 일상적인 일들도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챙김(mindfulness)의 자세로 현재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야 오후에 가야 할 결혼식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전날 저녁에 다음날 M&L 실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자는 나쁘지 않았지만 후자는 이틀동안 A-B-A-C-B 코스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실습장소로 향해 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치료자를 못하겠다고 할까, 내담자를 못하겠다고 할까 계속 고민했다. 실습장소에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들이 조금씩 보였다. 언제나 실습자들의 이모저모를 기억해 주시며 말을 걸어오시는 M&L teacher 원장님을 보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또 이곳에 와버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얼른 적응해내기 위해 자료집을 펼치면서 오늘 실습구성이 무엇인지 훑었다.
실습은 기어코 시작을 해버렸다. 다행히 모인 사람이 적어서 낯선 사람 비율이 낮은 것에 안심이 되었다. 뒤에 앉아있던 선생님과 loving beingness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뒤이은 자기소개 시간에서 첫 순서를 맡게 되었다. 주목받고 싶지 않아서 간단하게 소속과 이름만 말하고 그냥 앉아버렸다. 뒷 순서로 함께 loving beingness 연습을 한 선생님이 오히려 방금 전 연습을 통해 발견해 주신 나의 따뜻함에 대해서 말했다. 그 순간 조금 놀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따뜻할 수가? 아 이거였지, 환영받는 느낌.’
안전의 장: 나는 당신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진 <나의 경계선 찾기 트레이닝>에서는 오늘의 기분은 어떤지, 무얼 먹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조용히 물어봤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집에 혼자 있고 싶었으며 기분은 단순하게 ‘(실습 오기) 싫다’였다... 그런데 이렇게 loving 가득한 곳에 오기 왜 싫었을까? 조금 더 내면에 기울이자 ‘두려움’이란 감정이 보였고, 다시 왜 두려운 걸까 유심히 봤더니 ‘평가받기 싫어서’라는 이유를 찾아냈다.
스스로를 증명하거나 남에게 평가받는 상황은 오랫동안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내담자로서 이 발견을 공유하는데 벌써 눈물이 났다. 이 평가라는 키워드로 한참동안 선생님들과 이야기했다.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경계선을 침범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실습을 들어가기 전에 상대를 평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 곱씹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마야 안젤루)
다음으로 진행된 <내면아동(Inner child)> 실습부터는 수도꼭지가 열린 줄 알았다. 작년이었으면 눈물을 보인 실습 후에는 자중하고 내면을 덜 보였을 텐데 올해는 좀 솔직하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하반기동안 답답한 마음이 좀 풀어진 것이 마중물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울음이 터져 나온 이유는 비장의 엄마 카드를 결국 꺼냈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상처의 중심에 엄마가 있다는 것은 10년간 항상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을 결국 내보일 수 있었던 것은 마야 안젤루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변화에 대한 작은 다짐을 했기에 일어난 일 같다.
이전까지는 피상적으로만 문장을 바라보고 당연한 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에 공부한 중독자들의 재활상담과 앞선 <경계선 찾기> 내용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중독재활의 핵심은 부정적인 행동패턴을 끊어내고서 좋은 행동패턴으로 새롭게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계선 찾기> 연습은 내면의 욕구, 감정, 생각을 알아차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그곳을 향하려면 지난날의 상처를 어느정도 해결해야 상처가 만든 부정적 행동패턴에 휘둘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린시절 상처를 찾아가는 여정
이른바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내게 상처가 되었던 말 어록을 몇 가지 모았다. 10년간 사유하며 조금씩 모아온 말이었으니 작성은 쉬웠으나 하나하나 읽어낼 때는 목이 메였다. “더 잘 할 수 있었잖아, 이게 너에게 더 나은 선택이야” 같은 누구라도 들어봤을 법한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에 엄마의 목소리가 입혀지게 되면 가슴에 뭔가 들어선 듯했다. 상처받은 딸의 이야기를 들은 같은 그룹의 “엄마”들의 촉촉한 눈가와 찡한 코끝 그리고 loving 가득한 진심 어린 위로가 느껴졌다.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나 행동은 없었다. 너무나 오래 봐온 아이였고 그 아이도 오랫동안 나를 봐왔다. 그냥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기다려주고 싶었다.
실습 첫날을 마치고 헛헛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바라던 대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피곤에 쓰러지듯 자고 일어나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튿날 실습테마는 <내면아동>으로 계속되었다. 내면아동 주제로 <마음의 방>을 그리기 위해 어린 시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새롭게 발견된 더 어린 날의 상처를 기억의 벽에 기록했다.
엄마도 잘하고 싶었구나
또 정말 어렸을 때부터 엄마 옆에 껌딱지마냥 붙어있으려고 했던 낯가리는 아이가 보였다. 친척들 모임에서도 무조건 엄마 옆을 사수하고 경계태세를 풀지 않았었다. 연이어 8살 때쯤 집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부모님이 분리수거하러 나간 10분 정도 사이에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고 서럽게 울던 기억의 방이 나타났다. 문득 야자(야간자율학습) 마치고 집에 돌아올 시간이 10분 정도 늦었다고 엄마가 동네를 돌며 나를 찾아다녔던 기억과 겹쳤다. 이런 것까지 닮았구나 싶으면서도 둘 다 고작 10분만에 울며불며 하는 모양새를 나란히 모아보니 웃음이 조금 나왔다.
그러면서 ‘그때 엄마가 8살의 나처럼 불안했겠구나, 어린시절 본인처럼 불안한 모습의 딸아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했구나’ 라는 생각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단면적으로 ‘부모님은 항상 나를 사랑해, 방식은 조금 다를 순 있지’ 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더 깊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청소년기까지도 가끔 너무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가 아기를 대하는 것 마냥 자장가를 불러주며 토닥여줬다. 손이 꽁꽁꽁 노래에 가족들이 불러주는 이름을 넣어 직접 개사까지 했다. 어떻게 이렇게 큰 사랑을 잊고 상처받은 증거만 수집하고 있었던 건지 놀라울 정도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 가
하지만 10년간 지켜봐 온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도 도움이 필요했다. 이 아이에게는 오후에 진행된 <항아리 요법(Jewel box/Pot therapy)> 시간에 작은 선물을 줄 수 있었다. 가장 상처받았던 19-20살의 아이와 관련된 기억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 지 골라야 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 같은 집이 생각났다. 이 집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는 <Focus and Approach(F&A)> 요법이 응용되었다.
마음속의 아이는 충분히 작았기 때문에 인형의 집 정도의 크기면 적당했다. 하얀 벽돌의 벽과 빨간 지붕을 가지고 십자 모양의 창문과 나무 문을 가진 집이었다. 방 안에는 밝은 고동색 나무로 만든 침대에 포근한 연하늘색 침구세트가 올려져 있고, 무엇이든지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비밀정원 같은 언덕 위에 집을 마련해주고 한참을 그곳에서 노는 것을 지켜봤다.
실습 첫날에도 그랬듯이 내가 아닌 것들에 지칠 때면 항상 혼자만의 공간으로 몸을 숨기고 싶었다. 성인인 나는 그런 공간이 있었지만 아이에겐 그런 곳이 없었다. 직접 꾸민 집에서 혼자 온전히 쉴 수 있는 평화를 그 아이도 누렸으면 했다. 푹 쉬고 밝아진 아이의 표정을 보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가 담아온 것들 구경해보고 가세요
2일간의 실습을 통해 10년간의 마음 속 짐을 퉁퉁 부어서 뜨기 힘든 눈과 교환했다. 내담자로서만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의 상담치료 경험 이후에는 선생님들의 생각과 말투, 어미, 조사 등은 이전과 다른 인상을 주었다. 울림이 있는 말들만 필기했는데도 자료집에 글씨가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소중하게 담아온 것들 몇 가지를 여기에서 나눠보고자 한다.
- 치료자의 말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설령 치료자가 내담자의 감정이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담자가 ‘그게 아니라 내 마음은 이거예요’ 라며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치료적 대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 문제 사건 자체를 치료자가 해결해 줄 순 없다고 하더라도 내담자의 시선을 바꿀 수는 있다. 관점이 바뀌면 내담자의 세상의 바뀐다. 또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 내담자가 감정에 매몰되었던 에너지를 돌려서 다른 일을 할 힘을 마련해 줄 수 있다.
-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치료자 본인의 내면을 정리하고 비워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치료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를 점검하고 돌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 막연함은 사람을 막연하게 힘들게 만든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인 이유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내가 느끼던 감각의 본질이 이런 감정이었구나, 이 기억에서 비롯되었구나” 라는 깨달음은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 무서워해도 괜찮아. 다만 무서워만 하지는 말아라.
이외에도 정말 여러 말들을 담아왔지만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버려서 이만 줄인다.
돌고 돌아 결국 사랑
하지만 마지막으로 loving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M&L은 지금 여기서(Mindfulness)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겠다(Loving)고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들 중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은 두려움과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두려움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과 공부를 해가면서 생명체는 그 무엇보다 생존하기 위해 시스템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크게 느낀다. 불안한 것은 위협에서 도망치라고(Flight) 말하고 있는 것이고 분노가 치미는 것은 나를 침범하는 상대에 맞서 싸우라고(Fight)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는 상태에서는 이 상황이 지나기까지 전반적 시스템을 멈춰버린다(다미주신경이론). 에너지를 제한하다 보니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한없이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그 무리에서 쫓겨나 생존에 불리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사랑받기를 원하며 한없이 유약한 어린 시절의 사랑받지 못했던 또는 못할 뻔했던 순간들이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과 안전은 서로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진행하는 데에 loving을 보여주어 안전의 장을 마련해주고 내면의 어린아이가 지난날의 상처를 편안하게 내보이고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이번 실습을 통해서 또 한 번 너무나 큰 loving을 받아왔고 덕분에 마음 놓고 내 어린시절의 상처를 내비칠 수 있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가다 엄마의 사랑을 떠올리는 부분에서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구절에 진심을 가득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엄마를 만나면 오랜만에 따뜻한 사랑의 말을 전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달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제9기 M&L 심리치료 프로스킬 트레이닝 어드밴스드 코스의 실습이 대전대학교 서울한방병원에서 열렸다. M&L 심리치료는 Mindfulness와 Loving beingness라는 개념을 임상에 접목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일본 후쿠오카 유멘탈클리닉의 유수양 선생과 원광대학교 한방신경정신과 강형원 교수가 트레이너로 참여했다.
M&L 심리치료는 한방신경정신과 전공의 및 전문의를 비롯해 환자와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한의사들 사이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는 코스다. 올해 어드밴스드 코스에는 베이직 및 어드밴스드 과정을 모두 이수한 18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이로써 해당 트레이닝 코스 수료자는 총 244명에 이르렀다.
코스는 이론보다는 실무 중심의 임상 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레이너들은 환자에게 안전하고 깊이 있는 접근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실질적이고 적용 가능한 치료 기법을 발전시키고 있다.
M&L 심리치료 코스는 매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개설되며, 자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mnlkorea.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