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記憶)과 기록(記錄)
배용원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동촌(東村)
•前 청주지검장
•대한한의사협회 자문변호사
“말이 됩니까?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각종 청문회에서도 자주 보는 장면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직접 경험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뭔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이 비디오처럼 모든 장면을 생생하게 입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그대로 재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사고 상황이나 신호등, 운전자의 옷 색깔을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억과 증언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인간의 기억과 증언이 얼마나 불완전할 수 있는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는 숲속에서 한 사무라이가 죽은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사건에는 산적 다조마루,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 사무라이 자신, 그리고 현장을 목격한 나무꾼이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사건인데도 네 사람이 말하는 사건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는 점입니다.
다조마루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자신은 비겁한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는 사무라이와 정면으로 맞서 치열한 결투를 벌인 끝에 상대를 쓰러뜨린 용맹한 인물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산적에게 능욕당한 뒤 남편을 바라보니 남편이 차갑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고,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깨어나 보니 남편의 가슴에 단검이 꽂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사무라이도 무당의 입을 통해 증언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오히려 산적에게 남편을 죽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산적조차 아내에게 환멸을 느끼고, 아내가 도망간 뒤 사무라이는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무꾼이 자신이 실제 싸움을 목격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산적과 사무라이는 앞선 이야기에서처럼 용맹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겁에 질려 실수를 거듭하며 볼품없이 싸우고, 결국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입니다. 그러나 나무꾼의 증언 역시 온전히 믿기는 어렵습니다. 현장에서 사라진 값비싼 단검 때문에 나무꾼도 자신의 행동을 감추기 위해 사실을 다르게 말했을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라쇼몽》은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도 자신의 욕망과 체면, 이해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기억이 실제 사실과 달라지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라쇼몽》이 사람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받아들여 기억을 재구성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심리학의 여러 실험은 우리가 눈앞의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보았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
인지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억의 과정을 부호화(encoding), 저장(storage), 인출(retrieval)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수많은 정보가 뇌로 들어가 저장되며, 나중에 필요한 순간 다시 꺼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눈앞의 모든 정보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의를 기울인 정보를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보았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 pher Chabris)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입니다. 참가자들에게 사람들이 농구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특정 팀의 패스 횟수를 세어달라고 하자 화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고릴라 복장의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참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눈앞에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본 것을 모두 기억하지도 않고, 기억한 것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보존하지도 않습니다.
수사와 재판을 하다 보면 사건 관계인의 기억은 있는데 기록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재산을 증여해 주기로 약속했다는 주장과 그 뜻이 서면으로 남겨져 있는 경우를 민법은 다르게 취급합니다.
기억과 기록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기억한다”는 진술과 당시를 기록한 내용이 충돌할 경우 법정에서는 보통 후자가 우선시됩니다.
의료 분쟁에서 진료기록이 갖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사건을 다루다 보면 의료인은 당시의 상황을 분명하게 기억한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년 뒤 분쟁이 발생하여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 증상이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진료기록이 없다면 그 기억만으로 당시 상황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료기록은 의료인을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
반대로 환자의 병력과 증상, 진단 결과, 치료 내용과 경과, 의료진의 판단이 당시의 진료기록으로 남아 있다면 의료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거쳐 이루어졌는지를 사후에 입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재구성됩니다. 그러나 기록은 그때의 상황을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담아둔 그릇입니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진료기록은 환자의 치료 과정을 이어주는 자료이면서 때로는 의료인을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진료기록은 환자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의료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좋은 기록은 좋은 진료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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