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제도, ‘개선’이라 쓰고 ‘갈등’이라 읽다

기사입력 2025.11.2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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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필요한 것은 투표가 아닌 근거 기반의 설계와 논의”
    정훈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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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훈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장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추진하는 ‘전문의 제도 개선에 관한 회원 투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한의사 전문의 제도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대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협의·연구·설계 없이 전회원 표결만 요구하는 방식은 개선이 아니라 회원 간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1) 전문성 결여 문제

    전문의는 체계적 전공의 교육과정 위에서 탄생한다. ‘전문’이라는 의미는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병원에서의 수년간의 환자 경험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다. 

     

    병원 수련을 거치지 않은 전문의는 진정한 의미의 전문의로 인정받기 어렵고, 이는 전체 한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을 초래하며 기존 전문의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까지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현 제도의 문제점 분석과 중앙 차원의 체계적 개선 없이, 단순히 경과조치를 위해 전문과목만 늘리는 방식은 기존 전문의 제도의 근간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다. 누구나 취득할 수 있는 전문의는 전문적 의미를 상실하며, 회원들에게는 ‘전문의 교육’ 명목의 협회비 부담만 증가할 뿐 실질적 이득도 없다. 

     

    전문의 제도는 전문과목의 차별성과 철저한 교육·실습, 그리고 한의사 내부와 국민적 신뢰가 함께 구축될 때 비로소 기능한다.


    2) 제도 개선 내용·근거·책임의 부재

    현행 전문의 제도의 문제 진단, 개선 대안, 실행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개선’ 찬반만을 묻는 것은 내용 없는 백지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으라는 요구와 같다. '개선'이라는 단어는 변화의 방향이나 구체적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이러한 상태의 투표는 추후 중앙회의 정책 추진에 대한 회원 의견 개진을 막는 장치로도 보일 수 있다.


    모든 한의사를 대표하는 중앙회는 회원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 사전 연구, 정책 청사진, 예상되는 부작용 등을 제시하지 않은 채 표결을 요구하는 것은 그 책무를 방기한 것이며, 중앙회의 책임 회피와 배임적 행위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치의학전문의 제도를 참조하려면, 해당 제도의 성과·한계 평가와 한의계 적용 시 보완 대안이 선행돼야하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준비도 이뤄지지 않았다.


    3) 부작용에 대한 고려 부족

    통합치의학 전문의는 치과의 병동 환자 특성과 학문적 구조를 고려한 제도로, 양의계와 경쟁 관계에 있는 한의계 현실과는 맞지 않다. 무리한 적용은 오히려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더욱이 치과계에서도 “회비만 걷혔을 뿐 실질 변화가 없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점은 통합치의학전문의가 성공한 제도인지 재검토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전문의와 일반의의 차별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일반의의 전문의 전환을 추진하는 신설과·경과조치는 한의계 내부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민적 신뢰 또한 얻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양의계와의 불필요한 대립 프레임까지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지속 가능한 수련 배출 구조와 이를 뒷받침할 학회 활동·근거가 부재한 상태의 일시적 경과조치는, 결국 미래 세대의 성장 기회를 박탈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로 귀결될 수 있다.


    4) 선행연구 및 절차적 정당성 결여

    지난 2020년 대의원총회에서 ‘통합한의학전문의’ 신설 논의가 무산될 당시에도 준비 부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그 이후 전문의 제도와 전공의 수련과정에 대한 재점검, 전문과목 신설 논의, 정책 설계 및 연구, 회원·학회 의견 조회 등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협회 차원의 전문의 제도 개선을 위한 소위원회나 간담회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전문의 제도 개선’이라는 추상적 문구만으로 전회원 투표를 강행하는 것은 명백히 절차적 정당성이 부족하다. 더구나 투표 안내 이전에 이해당사자인 8개 전문과목 학회장,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 대한한의과전공의협의회와의 공식 논의도 없었다.


    신설과 추진을 목표로 한다면 이를 주도할 별도 학회의 발족과 충분한 연구·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 요건 없이 전회원 투표를 밀어붙이는 행태는 첩약 건강보험·한의대 정원 조정과 연계된 정치적 동원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는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현 전문의 제도의 문제점 및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개하라.


    △통합치의학전문의 제도의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한의계 적용 시 제한점·개선점을 포함한 구체적 시나리오를 제시하라.


    △8개 분과학회, 전문의협회, 전공의협의회가 참여하는 ‘전문의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제도 개선을 논의하라.

     

    전문의 제도는 '간판'이 아닌 그 전문성과 내용으로 평가받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향 없는 투표가 아닌 근거·설계·책임이 담긴 논의다.


    대한한의사전문의협회는 준비 없는 표결에 반대하며, 위 요구 사항이 충족될 때까지 회원의 이익과 한의학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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