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전통의약 질서 속 한의약의 길–참가자에서 ‘의제 설계자’로

기사입력 2025.09.1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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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O·JSOM·ICOM 참가를 통해 본 한의약의 미래
    오현민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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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민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이사

     

    [한의신문] 지난 수년간 국제무대에서 전통의약을 둘러싼 흐름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WHO는 2025~2034 전통의학 글로벌 전략을 새롭게 발표하며, 전통의약을 단순한 보완적 역할이 아닌, 근거 기반·안전성 확보·디지털 전환을 통한 보편적 건강보장(UHC)의 핵심 자원으로 제시했다. 

     

    인도에 설치된 WHO 글로벌 전통의학센터(GTMC), 일본·대만·중국의 제도적·학술적 진전, 그리고 신흥시장으로서 중동의 움직임까지, 모두 전통의약의 새로운 지형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이사로서 스위스에서 열린 WHO 회의, 일본 JSOM, 대만 ICOM 등 다양한 국제무대에 참여하며 이러한 변화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 한의약은 단순한 참가자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 전략과 의제를 설계하는 주도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절실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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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적 동향-WHO, 인도, 중국, 일본, 대만, 그리고 신흥시장


    첫째, WHO는 향후 10년간 전통의약을 위한 △근거 강화(연구와 데이터 축적) △안전성 확보 및 규제 정비 △보건의료체계 통합 △전통지식의 권리 보호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해줬다.


    특히 이번 전략에는 AI·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전통의약을 현대 의료 언어로 해석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둘째, 인도는 WHO GTMC를 유치하고 2.5억 달러의 초기 투자에 이어 8500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며 국제 거점을 강화했다. 전통지식 디지털 라이브러리(TKDL), Ayush Grid 등을 통해 전통의약 지식을 데이터화·표준화하고 AI와 접목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WHO 전략의 실행 무대가 제네바에서 인도로 확장된 것은 단순한 행정적 변화가 아닌 국제 규범화 속도가 인도를 중심으로 빨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중국은 ISO/TC249 사무국을 주도하며 123개의 국제표준을 제정했고, 추가 표준 개발을 추진 중이다. 중의약의 국가 전략화, 대규모 다기관 연구, 디지털 TCM 플랫폼 구축은 이미 국제 전통의약 표준화의 헤게모니를 중국이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일본은 규제와 안전성을 기반으로 ‘캄포(漢方)’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대만은 코로나19 치료제 ‘청관1호(NRICM-101)’를 통해 국제적으로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다. 정부 지원과 임상 근거를 결합하여 팬데믹 속에서도 ‘전통의약도 치료 의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아울러 신흥시장, 특히 UAE는 전통·보완·대체의학(TCAM) 제도화를 추진하며 한국과 협력 MOU를 체결했다. 아부다비 보건부는 한의사 면허와 스코프 제도를 제도화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한의약이 중동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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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보적 무기 ‘환자 중심 맞춤형 통합치료’로 공략

     

    국제적으로 거대한 자본과 데이터 기반의 중국·인도 양강 체제가 형성되는 가운데,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답은 우리 고유의 차별성과 임상 강점에 있다.


    첫째, 우리나라 한의약은 환자 중심 맞춤형 통합치료라는 독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의사는 한약 처방, 추나·수기요법, 약침·매선 등 다양한 처치를 하나의 의료인이 설계하고 집행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다기능적 역할이 아니라, 환자의 체질·병력·생활습관·심리적 상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임상 설계 역량을 의미한다.


    둘째, 복합질환 관리 역량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만성질환·암은 증상이 단일하지 않고 여러 기능과 증상이 얽혀 나타난다. 한의약은 이러한 복합질환을 통합적으로 진단하고 다층적인 치료 전략을 구성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셋째, 우리나라 고유의 체질의학은 국제적으로 각광받는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과 맞닿아 있다. 모든 인류가 체질을 갖지만 이를 진단·치료 체계로 발전시킨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체질의학을 과학적으로 표준화하고 데이터화한다면 이는 우리나라 한의약이 국제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독보적 자산이 된다.


    넷째, 우리나라는 대만형 전략이 필요하다. 대규모 자본과 데이터 경쟁에서 중국·인도와 맞붙기보다는, 대만의 청관1호 사례처럼 특정 질환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근거를 축적해 성공사례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자 효과적이다. 암 보조치료, 치매·불면·자율신경질환 등은 시장성과 학술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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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무대 추진 5 전략

     

    한국 한의약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① 국제표준화 참여 강화

    ISO/ICD-11/ICHI 등 국제 질병·중재 분류 체계에 한국의 치료법과 진단법을 반영해야 한다. 중국·인도의 독점 구도를 깨기 위해 한국형 표준화 작업반이 필요하다.


    ② AI·빅데이터 접목

    맥진·설진·HRV·EEG 등 다양한 전통 진단을 디지털화하여 AI 기반 진단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WHO 전략이 강조하는 “근거와 데이터 기반”에 기여하는 길이다.


    ③ ODA 및 국제보건 파일럿

    저자원국을 대상으로 비침습 진단 기반의 원격 진료·교육 플랫폼을 제공해 1차의료를 보완하는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WHO 전략의 “보건형평성” 목표에도 부합한다.


    ④ 고령화·암 보조치료 집중

    암 환자의 항암 부작용 관리, 치매·불면 관리 등 고령화 사회에서 수요가 큰 질환군을 중심으로 근거를 축적해야 한다. 이는 학술적 파급력과 글로벌 시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⑤ WHO 기술관 지속 파견

    현재 한국 한의약 연구자가 WHO 본부 전통의학 부서 기술관으로 활동하며 WHO 전략 수립 과정에 직접 기여했다. 향후에도 한국 한의사가 기술관으로 지속 파견되어 WHO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한국 모델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국제 의제 설계에 참여하는 실질적 채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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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의약, WHO 전략의 ‘의제 설계자’로 부상

     

    전통의약은 더 이상 각국의 문화적 유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고령화, 만성질환, 팬데믹과 같은 글로벌 보건 위기 속에서, 국제적 표준과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통합보건 자원이 되고 있다.

     

    한국 한의약은 자본과 데이터 규모에서는 중국·인도와 경쟁할 수 없지만, 정밀성과 과학적 근거로 특정 성공모델을 만드는 전략으로 국제무대에서 충분히 차별화할 수 있다. 

     

    복합질환과 체질의학이라는 고유의 강점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WHO 기술관 파견과 같은 국제 협력 채널을 지속 확보한다면, 우리나라 한의약은 WHO 전략의 실행 단계에서 단순 참가자가 아닌 의제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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