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한의대 교수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소장, 『몸이 기후다』 저자
문화와 자연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춥거나 더운 기후에 맞게 가옥과 의복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그 지역에서 사용가능한 자재와 재료가 집과 옷의 내용물을 이루는 것은 주거, 의복 문화가 자연과의 조응 속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보여주는 잘 알려진 예다. 음식 문화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수입 식품이 많아져서 “로컬푸드”를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식자재 세계화의 시대 이전에는 지역에서 나는 먹거리가 음식문화를 구성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지난 연재글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작년 12월부터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LA 산불”에서 이 산불은 한국어로 번역이 어려운 용어다. 영어 와일드 파이어(wild fire)를 직역한다면 야생 불이 될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으로는 의미 전달이 어렵다. LA가 속해 있는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기후와, 숲들이 들어찬 자연환경이 “야생불”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도 산지가 많지만 산불은 산에서 나는 불의 의미를 가지고, 대부분 인간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은 “야생불” 발생이 흔치 않은 자연환경의 결과이고, “야생불”이 한국어사전에 올라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의 의미 구조에서 문화라고 하면 자연과 분리된 무엇으로 이해되지만,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연과의 대화 속에 형성되었다. 자연은 깊이 문화에 들어와 있다. 이전 연재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손과 자연과의 관계와 같다. 인간의 손이라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 다른 동물에는 손이라고 불리는 신체의 부분이 없다. 침팬지도, 고릴라도, 다람쥐도 사지 말단에서 거머쥐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지는 손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인간의 손이 손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걷거나 뛰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운 사지의 부분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인류학연구들이 밝히고 있듯이 직립보행 자체가 자연과의 조응 속에서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해 인간은 유일하게 손을 가진 생물이 되었고, 그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며 문명을 전개해왔다. 여기에 인간의 손이 지금의 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손이 잡았던 수많은 나무들과 가지와 도구의 경험이 내재해 있었다. 그 손이 이제는 키보드를 치고, 스마트폰을 검색을 하고 최첨단의 도구들을 만들고 있지만, 그 행위들에도 기본적으로 숲의 나무를 거머쥐던 조응의 관계가 녹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문화에도 자연과의 조응이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앞의 문장들에서 필자가 반복적으로 “기본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하 것은 자연과 문화의 관계가 근대라는 시대 이후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차이를 보이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문화라는 생각이 어느 때보다 분명한 것이 근대 이후의 세계다.
여기에는 자연을 저기 바깥의 무엇으로, 여기의 인간 영역과 분리시키는 언어 사용과 의미 작용, 또한 공간화, 물질화의 작용이 역할을 했다. 그 분리의 체계 형성에 있어 근대 과학과 이성 중심의 철학이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자연(自然)과 자연(nature)을 분리하고 (이전 연재글 <인류세의 한의학> 8, “자연과 자연” 참조), 도시와 자연을 차별 공간화하고, 인간 밖 영역은 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언어물질적 수행들을 통해 만들어 졌다.
의료문화와 자연
도시에 살고 자동차를 타고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듯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떠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다. 의료문화 또한 자연과의 관계의 산물이듯이, 동아시아의 의료문화 또한 자연과의 관계의 산물이다. 전 세계 모든 의료문화가 그러하듯이 의료는 치료를 위해 자연에 있는 인간 아닌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동아시아의 인삼과, 하와이의 노니, 그리고 서양의학의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의 성분물질)까지 모두 인간이 치료를 위해 관계 맺고 있는 비인간 존재들이다.
여기서 아세트아미노펜은 좀 특별한 비인간 존재인데, 그것은 이 물질이 19세기 말에 인간에 의해 합성되었기 때문이다. 인삼과 노니와는 달리, 아세트아미노펜은 좀 더 인간의 영역에 가까운 비인간 존재이다. 인간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분리하려고 하는 근대적 경향 속에 아세트아미노펜은 탄생했다.
그 해열진통제로 널리 알려진 물질은 본디 석탄의 타르에서 왔지만, 이미 인간의 영역으로 진입해 있는 비인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연을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와서 통제하려는 근대적인 인간의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근대 이후에 자연은 인간의 영역과 분리되고, 대상화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이것 또한 문화와 자연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분리분절이 주 테마가 된 관계인 것이다.
성분을 대량생산하는, 인간의 영역을 강조하는 현대 서양의학과 달리, 자연에서 자라는 본초와 같은 생물을 주요 약으로 사용하는 동아시아의학의 경우는 자연과 문화의 다른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비인간 존재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당겨 통제하려는 의지가 근대적 방식과 같이 강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비인간 존재들은 그 존재의 행위성이 보다 중요하며, 그러므로 그 존재들이 기거하는 자연환경이라는 조건은 의료문화를 위한 핵심적 조건이다.
동아시아 의료문화의 주요 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본초는 많은 부분 농업 생산 방식으로 재배되고 있지만, 여전히 환경과 기후의 영향을 받는 식물들로서 그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인삼과 같이 열에 약한 성질이 있는 본초들은 지금의 기후변화에 특히 취약하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라고 일컬어지는 최근의 기후변화는 여름기간의 지속과 최고 기온의 기록 갱신으로 특징 지워진다. 여름은 봄의 기간과 가을의 기간으로 계속해서 앞뒤로 늘어나고 있으며, 일 년 중 반년 정도가 여름 날씨로 채워지는 경우가 갈수록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에 따른 기온 상승으로, 최근에는 매 여름마다 최고 기온 기록이 갱신되고 있다. 최고 기온 기록뿐만 아니라, 밤에도 열이 식지 않는 열대야(최저 기온이 25 이상인 경우) 지속 기간의 기록도 갱신되고 있다. 이러한 “기후변화”를 인간뿐만 아니라 본초도 경험하고 있다.
문화와 자연의 관계 속의 본초
이러한 갈수록 더 더워지고, 더 길게 더운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서, 예를 들면 더위에 약한 인삼은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인삼에의 영향은 단지 고온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기후위기의 상황은 기후를 갈수록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며 특히 집중폭우의 문제는 인삼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기후요인이다. 갈수록 더워지는 날씨는 표면의 습기를 흡수하여 빠른 시간에 비구름을 만든다.
또한, 더워진 바닷물은 비구름을 공급하는 마르지 않는 수원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우 또는 장기간의 강우 등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으며, 이것은 뿌리식물인 인삼에게 크게 영향을 준다. 변동이 큰 기후변화의 상황은 1년 만으로 농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년 근을 생산해야 하는 인삼농사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다년근 뿌리를 약재로 사용하는 황기의 경우에도 늘어난 강수량에 영향을 받고 있고, 산지가 바뀌고 있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본초가 가진 성분은 중요한 논의 주제이지만, 실제 한의학 처방에서 성분을 추출하여 그 조합으로 처방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본초의 조합으로 처방을 구성하고 그 탕약으로 약을 처방하는 한의학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본초가 직면한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문화와 자연의 관계 맺기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와중에 동아시아에서 상정했던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다(다음 연재글 “기후위기와 본초의 위기”IV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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