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33)

기사입력 2024.11.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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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한국민족의학연구소의 설립을 제안했던 노정우 교수
    “한의학의 미래를 열 길을 후배들에게 제시했던 노정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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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94년 7월 노정우 교수는 『과학과 기술』(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논문집) 7월호에 「한국민족의학연구소 설립을 제의한다」라는 제목의 특별기고를 한다. 


    盧正祐 교수(1918∼2008)는 황해도 松禾郡 豊川 출신으로 金永勳, 趙憲泳의 門下生으로서 한의학을 연구해 한의계를 학술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이다. 그는 동양의약대학 부교수, 경희대 한의대 교수, 경희대 부속한방병원 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갔다. 이후 홀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한국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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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우 교수의 따님 노효신 선생과 사위 윤동원 선생이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기증한 자료를 살펴보면 노정우 교수가 한국민족의학연구소를 설립하고자 마음을 먹고 실행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이전부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1976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그가 자필로 작성한 ‘건의서’라는 제목의 메모를 통해 알 수 있다. 


    1976년 이전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자신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동의학부장겸부속병원장 노정우’라고 호칭한 것에 근거한다. 또한 의과대학에서 한의과대학으로 독립해서 한의과대학이 설립된 것이 1977년부터이므로 그 이전인 것으로 판단된다. 1976년 3월1일에 제2대 한방병원장 강효신 교수가 취임했고 이전까지 그가 초대 한방병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건의서에는 본 연구소의 설립 취지와 목적, 동의학의 현황, 우방과의 관계, 사업계획 등을 명시하고 있다. 


    또 다른 기증 자료로 ‘재단법인 한국 민족의학 연구소 정관’이라고 적힌 9쪽짜리 자료도 눈에 띤다. 이 자료는 노정우 교수가 개인적으로 연구소가 설립된 후에 정리되어야 할 정관을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 자료는 마지막 부칙에 “이 정관은 보건복지부장관의 허가를 받은 날부터 시행한다”라는 문장을 근거로 1994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 호칭이 변경된 것이 1994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노정우 교수가 『과학과 기술』에 특별기고한 「한국민족의학연구소 설립을 제의한다」는 글에서 그는 이와 같은 연구소가 필요한 이유로, 첫째 사상(체질)의학의 체질감별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지원책이 요청됨, 둘째 국민의 체력이 곧 국력이란 개념 하에 서양의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국민의 보건 및 의식주와 생활습성 등을 비롯한 체력 관리상의 연구와 거시적인 정책의 확립이 시급, 셋째 동서의학의 두 제도가 병존한 가운데 우리 실정에 알맞고 미래지향적인 의료 정책 및 생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의료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 개발이 요청됨 등을 꼽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의학의 국부적이며 미시적인 생명관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적 속성으로 全人으로 총합성과 통일성이 결여되는 폐단과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시책면에서 그는 ①국가적 연구기관으로 한국민족의학연구소의 건립 ②동서의학이 융합된 제3의학을 창출 ③암, 중풍, 성인병, 정신병 등의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한 연구병원 개설 ④우수한 한의사 및 학자를 육성하여 외국에 문화사절로 파견 ⑤국민 전체의 체력 관리를 위한 연구계몽지도 및 기관지 발간 ⑥현대의학을 전공한 의사 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단기대학원의 개설 ⑦해외 의료기술자의 보수교육을 위한 단기강좌 개설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연구소 설립을 위한 노정우 교수의 노력들은 현재 한의계에서 이어지고 각종 연구와 교육, 정책 등을 통해서 일부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깊은 역사적 안목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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