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런던에 거주 중인 언니네 시댁 도련님은 매년 요맘때 한국에 들어온다. 건강검진과 1년간 검색해 둔 핫플 순례가 중요한 목표다. 맛집에 진심인 데다가 최근 『흑백요리사』까지 정주행해서 식당 리스트를 엄선 중이라고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눈치 빠른 한국 사람들 성격 모르냐고, 웨이팅 등록 그 시작부터가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덜 유명한 집들로 목록을 꾸려보거나 찐 맛집들은 내후년에나 시도해 보라고 말해두었다. 한국 떠나기 전 저녁을 한 번 사드려야 할 것 같은데 콧대 높은 파인다이닝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여의도 직장인들이 최고로 손꼽는 순대국집이 국회 코앞에 있으니 그리로 모시면 따봉을 외칠 것이 분명하다.
연말모임 날짜를 잡기 시작하는 10월 말이 되니 친구들은 “올해도 다 갔네!” “여기저기 아픈 거 보니 진짜 나이드는 게 뭔지 알 것 같아!”라고 하고, 가까운 선배님들은 “내년에 드디어 내가 환갑이란다!!” “2년 후에 퇴직한다. 그리고 긴 여행 떠날거다” 등등 각자의 나이와 환경과 건강 상태에 따라 연말을 맞이하는 마음도, 기분도, 약속의 개수도 다른 것 같다. 건강 주제가 대화의 토픽이 되는 순간부터가 노년이라고 하더니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서 질병 관련 이슈가 많았던 한 해였다. 해가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는 않겠지. 나도 그들처럼!!
10월 국정감사의 달…한의진료실도 ‘문전성시’
10월은 국정감사의 달이다. 지난주 월요일 진료를 마치고 이런저런 밀린 업무를 보고 조금 늦게 퇴근을 하는데 도시의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야근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을 증명하듯 본청은 물론이고 국회의원회관, 소통관까지 불이 다 켜져 있었다. 야근이 없는 부서 직원들은 오후 6시면 퇴근이 가능하지만 국감과 관련된, 특히 의원실 보좌진들의 10월 한 달은 라꾸라꾸에 새우잠을 청하며 집에 갈 생각은 잠시 접어야 하는 시간이다. 다들 이토록 야근에 몸과 마음을 갈아넣고 있으니 어디 안 아픈 데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오전 9시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종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며 직원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만덕산 칩거로 유명했던 한 원로 정치인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과 18대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분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던 때가 2012년이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저녁은 없고 야근만 남았다. 또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그런 사회가 된 건지 아직 아닌건지도 잘 모르겠다. 소수지만 묻지마 범죄 가해자들이나 안전불감증으로 귀결되는 산재 사고 뉴스들을 들여다보면 ‘사람 목숨을 도대체 얼마나 가볍게 여기면 아직도 이 지경이란 말인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한 시절의 유행어 같았던 정치인들의 구호는 숱한 성대모사만 양산한 채, 돌무덤에 핀 이끼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자신이 건강 챙겨야”
내년이면 팔순이 되시는 친정 어머니, 별무질환 이시지만 가끔 오른쪽 무릎 내측 통증을 호소하신다. 컨디션이 좋으신 날엔 하루 2만보도 거뜬하셨다가 하루 전 무리한 일정으로 상태가 좀 안 좋으시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으시다. “팔십년을 썼으니 아픈 건 당연하다이, 내 몸이 아파봐라, 너희들이 어디 나가자고 해도 내가 못 나간다고 할텡께. 대신, 내가 어디 간다고 하믄 말리지 말고 냅둬라이, 무릎이 버팅께 다니제, 지 몸 아픈 건 지가 젤 잘 앙께, 느들 엄니 어디 댕겨온다 그러면 걱정부텀 하지 말라 이 말이여!”라고 다부지게도 당부하신다.
요는 내 몸 내가 잘 알고 상태 봐 가면서 외출할테니 내 앞에서 가라 소리도 가지 말아라 소리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맞는 말씀이다. 내 몸 내가 알아서 잘 챙길 것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다섯이나 있는 딸들 중 한두명에게 말할테니 본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해 달라는 어머니의 어명. “각자의 건강, 알아서 잘 챙겨야 일차로 가족들에게, 이차로 직장에 피해 안 주는 것이니, 내 몸이 제일 중한 줄 알고 아껴감서 일하라”는 엄니의 멈추지 않는 사랑의 잔소리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몸은 알고 있다』(뤼디거 달케, 토르발트 데트레프센, 이지앤, 2006년 4월)
독일의 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뤼디거 달케의 주요 연구 분야는 심신상관 의학이다. 공저자인 토르발트도 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이다. 책의 주제는 질병과 증상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환자들의 절대 숫자를 줄이지 못하고 있는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과 진정한 치유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조언도 담겨 있다. 염증 질환부터 호흡, 소화, 감각기관, 심장, 신장, 피부 질환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인 증상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각 증상의 심리학적 해석이 포함돼 있다.
-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이 병에 걸리는 것은 건강함의 일부다. 인생이란 결국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질병은 인간에게 치유가 가능하도록 해준다. 질병은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도록 해주는 전환점이다. 환자가 질병이 전하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그 증상과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 증상이 자신에게 신체를 통해 깨우쳐주려고 애쓰는 것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환자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의식 속으로 들여보냄으로써 증상이 나타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 치유하는 것은 항상 의식이 넓어지고 성숙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근절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병에 걸린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점점 더 심한 질병에 빠져들고 결국 죽음으로 그 절정을 이루도록 관장한다. 몸의 각 부위는 최종적으로 무기질로 돌아간다. 자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간이 인생의 각 단계를 지나 점차로 이 종착지에 다가가도록 해놓았다. 질병과 죽음은 인간의 넘쳐나는 과대망상을 깨뜨리고 모든 편협한 행동을 바로잡아 준다.
『몸과 인문학』(고미숙, 북드라망, 2013년 1월)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동의보감』의 시선에서 우리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 등에 대해 진단한 인문비평 에세이로 동양의학과 역학에 대한 입문서 격의 책이다. 몸과 관련된 여성, 사랑, 가족, 교육, 정치, 사회, 경제를 논하면서 『동의보감』이라는 확대경을 사용한다면 이 인문학적 표제어들은 어떤 내용들로 보여질까?
- 질병은 생명의 능동적 전략이기도 하다. 아픔을 통해서만이 삶의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삶과 질병,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병과 죽음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표징이자 생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도 질병도 죽음도 다 상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병을 몰아내고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한다.
-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命)을 말하고 인생의 길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앎’이다.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열린다! 신비와 미신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또한 거기에 있다.
- 양생술의 핵심인 수승화강이란 지혜와 열정의 활발한 순환에 다름 아니다. 지혜와 열정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특권이자 소명이다. 그러니 물은 흐르게 하고 불은 타오르게 하라!
『우리 몸이 세계라면』(김승섭, 동아시아, 2018년 12월)
1120편의 논문과 300여 편의 문헌을 근거로 20년 동안 의학과 보건학을 통해 공부해온 몸과 질병에 관한 주제들을 ‘지식’에 방점을 찍고 집필한 김승섭 교수의 저서이다. “조선, 당대의 한계에서 최선의 과학을 한다는 것” “자신의 경험을 믿지 않는 일-데이터 근거 중심 의학에 관하여” “상식과 싸우는 과학” 등의 챕터는 한의학 전공자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 당대 여러 역량의 한계 속에서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민하고, 그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바꾸어나간 과정이 저는 놀랍습니다. 그래서 저는 『향약집성방』이 훌륭한 과학 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홍역이나 수두는 자연적으로 치유되므로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아키를 만든 한의사 A씨의 주장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안아키의 권고사항을 두고서 대한한의사협회는 “안아키의 방법은 한의학적 치료와 무관하다“라며 사이트 폐쇄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 얼마 전 어깨가 아파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병원 벽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며 약을 홍보하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근거가 없는 치료법이지만 병원에서는 버젓이 치료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주의 치료법, 기 치료, 마늘주사 모두 다음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병원에서 치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치료자가 주장한 그 효과가 진짜로 있는가?’입니다. 치료 효과에 대한 통계적 검증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접근을 동양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제에 대한 서양 과학의 폭력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허준이나 정약용이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당연히 동양의학의 여러 치료법에 대한 투명한 역학적 검증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환자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은밀한 몸』(옐 아들러, 북레시피, 2019년 11월)
저자인 옐 아들러는 독일의 피부,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일상에서 말하기 꺼려하고 민망해서 실제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비밀스런 증상을 주로 모아놓은 책이다. 무좀, 입냄새, 생식기 피부병, 항문 질환, 남성과 여성의 탈모, 폐경 및 갱년기, 심한 발냄새, 지독한 방귀, 몸에 생기는 큰 점, 노화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등등.. 감각기관 별로 구분하여 “몸에 관한 한 못할 말은 없다!“는 마인드로 터부시된 내용들을 정리했다.
- 장환경이 건강하면 좋은 박테리아가 에스트로겐 생산을 돕는다. 중요한 것은 식습관이다. 아무리 최고의 식품이라도 대충 씹어 삼켜버리면 장환경에 별로 유용하지 않다.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먹고 천천히 충분히 씹고 모든 장기적인 스트레스를 피하라.
- 후성유전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바로 시트루인 효소인데, 이것은 건강을 돕고 수명을 연장한다. 이 시트루인 효소에 활기를 불어넣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칼로리를 줄이면 된다! 인간의 경우 간헐적 단식으로 칼로리를 줄일 수 있다.
- 세포가 늙는다는 말은 결코 아름다운 말이 아니다. 세월과 함께 은퇴한 늙은 세포가 점점 늘어난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늙은 세포는 종종 성마르고 괴팍하고 노망이 들린 듯 공격적이다. 그들은 염증 제작자와 단백질 파괴자를 파견한다. 그리하여 불행히도 젊고 신선한 세포들 역시 더 빨리 늙는다!
- 정신이 아플 때 몸까지 아픈 건 당연하다. 위로와 조언으로 우울증 환자의 기운을 북돋우려 노력해봐야 소용없다. 우울증 환자는 깊은 늪에 단단히 붙잡혀 있어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몸과 영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영향을 미친다. 힘들 땐 그것을 말하고 도움을 찾아야 한다.
『삶은 몸 안에 있다』(조너선 라이스먼, 김영사, 2024년 1월)
내과 및 소아과 의사이자 작가, 탐험가인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외진 지역에서 주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고 임상의로 근무하면서도 인도의 의료 및 교육을 향상시키기 위한 비영리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 흐름이 중요하다는 개념은 기의 흐름이 막히는 것을 대다수 질병의 원인으로 보는 전통 중국 의학의 원리와 비슷하다. 알고 보면 서양 의학에도 같은 원리가 깔려 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할 일은 막힌 곳을 풀어주고 체액이 다시 제대로 돌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료 행위의 대부분은 배관 수리다. 심근 경색은 배관의 문제다. 반면 심정지는 전기적인 문제다.
- 생체 항상성은 한마디로 여러 박동을 정교하게 아우르는 활동이다. 그 속에서 각각의 멜로디가 돌고 돌면서 템포가 변하곤 한다. 의술을 배운다는 것은 곧 몸의 음악을 배운다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리듬에 친숙해지고 리듬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 의사로서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쌓으면 다른 사람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파악할 수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을 저질렀든, 의사 앞에서는 누구나 보살핌이 필요한 약자다. 공감이 항상 쉽지는 않지만 늘 중요하다.
- 의대에서 혈액에 관해 배우고 나니, 혈액이 우리 몸 구석구석에 나르는 모든 영양소 중에서도 온기는 가장 중요한 성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18을 오쉿팔이라고 명명하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폄훼하는 한 소설가의 악플에 가까운 페북글을 다 읽기도 전에 일부 보수단체들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는 기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축하나 감동의 강도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경사스런 일에 똥물 먼저 뿌릴 생각을 하는 자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이과생들은 쪼잔할 정도로 디테일에 매달려야 겨우 뭐 하나 세상에 내어놓을까 말까 하는 테크니션들이다. 역시 대중들의 마음에 크고 깊은 울림을 주는 일은 문과생들이 해내는 것 같다. 문과에 법대만 있는게 아니라 국문학과가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려준 한작가님께 진심의 축하를 보내고 싶다. 사두고 읽지 못했던 많은 책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재촉한다. 특히나 손이 잘 가지 않았던 소설이라는 장르에 뒤늦게 애정의 눈길도 추가해 본다. 몇 주 전 수퍼문을 올려다보며 slow! soft! steady! 세 개의 단어를 읊조려 보았다. 천천히 말하고, 부드럽게 생각하고, 꾸준히 실천하기. 성급한 초겨울 바람에 어깨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쉬운 요즘 같은 시기를 건너가는 지혜로은 덕목임을 깨달으며 이렇게 10월을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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